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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되었고, 종묘와 사직을 보위하기 위해 최선 을 다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이완용을 비롯한 매 국 대신들에 의해 을사5조약(을사늑약)이 체 결되자, 그는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 느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중추원 의 관으로 전임되어서도 ‘을사5적’의 처단을 상 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 일제의 침략이 계속되고, 부일(附 日)매국노 이완용 매국 내각의 책동으로 결 국 1910년 8월 경술국치(한일 강제병합)의 비극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 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犬馬猶能懷主德 賊臣 何忍賣君欺)” 경술국치 후 그는 통곡하면서 관직을 버리 고 낙향하여 다시 은둔하였다. 또한 의관을 정제하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도 말하고 웃는 일이 없이 지냈다고 한다.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단식 순국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의 영향력 있는 유력 자들에게 작위(爵位)와 은사금(恩賜金)이라는 것을 수여하여 이들을 회유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획책하였다. 장태수에게도 일 제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 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 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 을 수 없다”고 호통하여 쫓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헌병이 찾아와 위협하 며 은사금 받기를 강권하였 지만, 그는 끝내 항거하고 받 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헌병 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 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단 행하였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과 함 께 음식을 끊고 의지를 굳건 히 하였다. 장태수가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남강정사(南崗精舍).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에 있다( 독 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