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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4년 6월 Special Theme 제14회 ‘의병의 날’ 기념 특집 ‘대한제국기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제의 의병 탄압’ 어서 전국적으로 볼 때는 의병투쟁이 전에 비해 현 저히 약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나, 호남지역 특히 전 라남도에서는 의병들의 투쟁이 위축되지 않고 지속 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조선에 진출해 있었던 일 본 경제인들이 이런 상황을 한국통감부나 일본 군부 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고, 의병에 대한 ‘대 토벌’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호남지역에서의 의병투쟁의 격화와 조선 민 중들의 저항을 일제의 경제침략과 식민지화 정책 추 진의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 한 수단으로 결국 폭력적 ·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하여 일제는 소위 ‘남한대 토벌작전’을 펼쳐서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을 잔혹하 게 진압하였다. 일제는 1907년 후반부터 1909년까지 집중적으로 의병을 탄압했는데, 이 기간에 희생된 의병의 수는 일본 측 자료로 확인 가능한 것만 해도 2만 명에 가 까우며 부상자는 그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런 일제 의 의병 진압 중에서 가장 가혹했던 ‘남한대토벌작 전’에 관한 생생한 모습의 단면을 『한국 전라남도에 서 찍은 사진』은 보여준다. 신응희를 제외하고 사진 에 나온 호남 의병들 중에 심남일 · 강무경 · 양방매 · 양 성일 · 심남일의 첩은 전라남도 능주 풍치의 바위굴에 서 함께 숨어 있다가 결국 임시한국파견 보병 제2중 대 제3연대에게 1909년 10월 9일 체포되고 말았다. 심남일 · 강무경 · 양방매 · 양성일 · 심남일의 첩 등을 찍은 다섯 번째 사진은 그런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 여주는 것이다. 일제의 입장에서 볼 때, 호남의병의 핵심을 이루던 전해산 · 심남일 · 강무경 등을 체포한 것은 자랑할 만한 성과였다. 그들은 전해산과 심남 일을 ‘수괴 중의 거벽’으로 평가하였으며 강무경도 ‘폭도수괴’로 인정하였다. 특히 심남일과 강무경 등 을 체포한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 부에 있어서 수일(首一)이라 칭하는 거괴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 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전해산 · 심남일 · 강 무경의 단독 사진을 찍은 것도 그만큼 자신들의 성 과를 보고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 전라남도에서 찍은 사 진』은 성공적인 의병진압을 상부에 보고하고 기념하 기 위해 작성된 것이며, 이것이 결국 일본 황실까지 올라온 것이 아닐까 한다. 다섯 번째 사진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점이 있 는데, 일제가 이름은 밝히지 않고 단지 심남일의 첩 과 강무경의 아내로 기술한 두 명의 여자이다. 그나 마 강무경의 아내는 양방매(梁芳梅, 1890~1986)로 알려졌고, 남편 강무경과 함께 의병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받아 2005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 러나 심남일의 첩은 이 자료 외엔 아무런 흔적을 남 기지 않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체포될 당시 심남일 과 강무경은 함께 일본군의 추적을 피할 겸 신병 치 료차 능주군 풍치 산중에 있는 바위굴에서 은신생활 을 하고 있었다. 양방매와 심남일의 첩으로 서술된 여자는 식량을 나르고 그들을 간호하며 물심양면 돕 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들의 남편인 심남일과 강무경은 체포된 후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아 같은 해 10월 4일 대구감옥소에서 순국하였다. 전해산 · 강무경 · 심남일은 모두 죽어야 할 곳에서 죽 음을(死於死) 선택하지 못했으나, 의연하게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