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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미주동포로부터 자금 이 끊어지면서 상해 임시정부는 재정적 어려 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그는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 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전 개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 총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편 한인사회당은 박진순과 한형권 등 특 사들의 노력으로 볼셰비키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차관제공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다. 한인사회당은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을 건네받았는데, 이 자금은 1920년 말 그리고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인 1921년 3 월 말경 상해로 운반되었다. 독립전쟁론 등 급진론의 득세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전면 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1921년 1월 초에 개 최된 국무원회의에서 이승만 에게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대통령제의 폐지와 혁명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무위원제의 채용을 주장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와 다른 내각원들의 반대 로 임시정부 개혁안이 좌절되 자, 마침내 1921년 1월 국무총 리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노혁명가 1921년 6월 하순 상해를 떠난 이동휘는 국 제공산당이 고려공산당 해산 후 1923년 초 조직한 꼬르뷰로(Korbureau)내에서 창조 파의 국민위원회를 지지한 국민의회파의 한 명세와 대립하였다. 그는 1923년 말 한명세 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부 의 정책에 반대하여 국제공산당의 꼬르뷰로 (高麗局) 위원을 사퇴하였다. 국제공산당은 1924년 초 꼬르뷰로를 해산하고 고려공산당 창립을 목표로 한 오르그뷰로(Orgbureau, 조직국)를 조직했다. 그는 말년 원동변강(遠東邊疆 ; 러시아 연 해주지역)의 모플(MOPR ; 국제혁명가후원 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모플의 목적은 혁 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 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 활동에 있었다. 그는 모플활동을 위해 스찬 지방을 방문했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사진(1920.1.1,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