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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9월30일 월요일 6 (제213호) 기 획 경상북도남동부에위치한월성(경주)는박씨(朴氏)의본향(本 鄕)이다.경주평야에있던여섯부족의촌장들이기원전57년박혁 거세(朴赫居世)를왕으로추대하면서개국하여건국후밖으로주 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였으며, 안으로 정치체계를 발전시켜 전세계적으로최초의민주주의를실현한나라라고할수있다. 사로국(斯盧國),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 (新羅)로 불려오던 중 탈해왕 9년(65년)에 계림(鷄林)으로 개칭 되었고, 22대 지증왕대에는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지었으며, 23대법흥왕대에는불교를공인해찬란한불교문화의막을올렸 다. 이처럼국가의면모를일신한신라는그기세를몰아고구려,백 제를병합하고676년에는삼국통일의성업을달성한통일국가신 라는평화로움속에서눈부신문화적발전을이룩해갔다. 고려태조18년(935년)경주로칭하였고,987년동경으로개칭,1 012년 경주로 개칭, 1308년 계림부로 개칭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413년경주부,1895년경주군으로되었다. 1931.4.1.경주면이읍으로승격(1읍12면),1937.7.1.양북면감 포리외8개리분리감포읍으로승격(2읍11면),1949.5.20.강서면 이 안강읍으로 승격 (3읍 10면),1955.9.1.경주읍이 시로 승격,군 명칭을월성군으로,1989.1.1,월성군이경주군으로개칭1995.1.1 통합경주시출범(4읍8면17동)하였다. 월성박씨 가문(家門)의 인맥을 보면 고려와 조선 시대에 많은 명현이 배출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박구 (朴龜)를 비롯 조선 선조 때 우리나라 최대의 국란(國亂) 임진왜 란에는의병을일으켜나라를구했으며,한말(韓末)을사보호조약 (乙巳保護條約)의 울분으로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능일(能一) 등일제강점기조국의광복을위해많은후손들이몸을던졌으며, 효행(孝行)과 학문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한 명문가문이라 할 수 있다. 월성대군의 휘(諱, 이름)는 언의(彦儀),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 들이다. 월성대군의 아들 견(甄, 2世)은 고려조 문과에 좌사간(左 司諫)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손자 호(灝, 3世)는 판예 부사(判禮部事)로아버지에이어월성군(月城君)에봉해졌다. 증손영록(永祿,4世)은예부시랑(禮部侍郞),현손정세(貞世,5 世)는 호부상서(戶部尙書), 6世 방량(方亮)은 문하시랑(門下侍 郞) 봉(封) 월성군(月城君), 7세(世) 박(珀)은 문하시랑(門下侍 郞), 8세(世) 지(智)는 호부의랑(戶部議郞), 9世 천가(天佳)는 추 밀원사(樞密院使),10世인육(仁育)은대릉직(戴陵直,永陵直),11 世 겸형(兼亨)은 공조전서(工曹典書), 12世 유(瑜)는 문하시중 (門下侍中)으로월성대군을비롯한11세의문헌과묘소가실전되 어경주시삼릉근처남산기슭에설단향사한다. 문하시중유(瑜)의아들구(龜,월성대군13世)는중군사정부령 (中軍司正副令)을지냈으나고려가망하자벼슬을버리고두문동 에은거하였다가나중에 인천에 있는산중에 은거하고 있어이산 을장아산(藏我山)이라불려졌다. 그 후조선 태종이여러차례에 걸쳐벼슬을 하사하며 불렀으나 끝까지절의(節義)를지켰고,망경태(望京台)에올라망국회한을 통곡으로달래다가장아산에서일생을마쳤다. 그의 아들 간(幹)은 양신(良臣,슬기롭고 어진 신하)의 한 사람 이다. 그는 아버지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고 있어 섣불리 벼슬길 에 나가지 못했으나, 그때는 그때요 이때는 이때라고 유명(遺命) 하심에 따라 태종 16년(1416년) 친시(親試)에 처음으로 응시하여 유학(幼學)으로제1등에올랐다. 이로부터 문명이 조정에 휘날리게 되었고,간관(사간원과 사헌 부의 관리)에 발탁되어 곧은 말로 당세를 흔들었다. 특히 성균관 유생을위하는것이많았는데이로인하여호학(好學,학문을좋아 하는선비)사람으로좋은소문이나라에더욱퍼졌다. 세종16년(1434년)성균관대사성에오르고단종원년호조참판, 단종 2년(1454년) 예문관 대제학 수(守) 판의금부사를 역임하고 증직으로는 의정부 좌찬성이다. 슬하에 아들 휘(徽), 옹(雍), 숭 (崇),준(峻)등 4형제를 둠으로서 크게 번성하게 되고,이후 이들 후손들은 참의공파(휘 덕승,월성대군 18世),학수공파(휘 학수,1 8世), 사정공파(휘 사문, 17世), 고암공파(휘 민록, 21世), 관포공 파(휘홍미,19世),전적공파(휘사증,25世),세마공파(휘대이,20 世),계당공파(휘 대항,20世),진사공파(휘 대순,20世),설봉공파 (휘 대함, 20世), 후포공파(휘 홍업, 19世), 생원공파(휘 원룡, 18 世),송애공파(휘 여룡,18世),해강공파(휘 성룡,18世),운암공파 (휘 홍수, 19世), 추산공파(휘 홍중, 19世), 참판공파(휘경룡, 18 世),락재공파(휘 세명,21世),현감공파(휘 종겸,16世),인재공파 (휘 사문,16世),무계공파(휘 민수,18世),성은공파(휘 간,21世), 락옹공파(휘 응상, 19世), 중군공파(휘 길, 21世), 유촌공파(휘 종 남,20世),송은공파(휘위,21世),임계공파(휘민영,18世),청계공 파(휘 민화,18世),고은공파(휘영손,20世),진사공파(휘 경문,16 世),운계공파(휘응강,19世),부사공파(휘인득,20世)등32개소 파로분파되어세계를이룬다. 참의공의 휘(諱, 이름)는 덕승(德昇, 월성 대군 18世)으로 공조 참의(工曹 핫 議)를역임했다. 증조(曾祖)휘 휘(徽)는 성품이티 없이맑고 성실하여 사친(事 親, 어버이 섬김)에 지효하여 이웃에 칭찬됨이 많았고, 일을 처리 함에 공정하여 단종 원년 계유(癸酉,1453년) 사마시와 문시에 올 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열중하였는데 후에 추천하는 상소가 있어 벼슬에 나가 안변대도호부사, 장예원판결사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고, 사후에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증직되었다. 조부(祖父)의 휘는 신겸(信謙)으로 통례원좌통례를 지내고 통 정대부사헌부집의에증직되었고,고(考,아버지)의휘는사량(士 良)으로당진현감이고,아들휘경문(景文)은교리(校理),손자철 명(哲明)은통정대부봉순랑으로처음영천죽전에입향한선조이 다. 학수공파의 파조의 휘(諱)는 학수(鶴壽)이다.성균진사로 당진 현감을지낸사량(士良)의셋째아들이다.그의아들유지(有枝)는 정산현감, 손자 운종(雲從)은 안악군수, 증손 문창(文昌)은 금산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후손들은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동에 세거 한다. 사정공의 휘는 사문(휘 士文, 17世)으로 관직은 사정(司正)이 다. 통례원 좌통례를 지낸 휘 신겸(信謙)의 아들 6형제중 막내이 다. 맏형 사량(士良)은 참의공파 덕승의 아버지이고, 중형(仲兄. 둘째) 사공(士恭)은 호겸(好謙)의 뒤를 이었고, 숙형(叔兄, 셋째 형)이하는무후이다. 아들동선(同善)은선략장군용양위부호군좌부첨정,경상우후 를,손자은손(殷遜)은조부의뜻에따라무과를선택하였다. 선조 4년(辛未, 1571)에 함경도 종성부사(종3품), 전라좌수사 (당상관)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익문(益文) 또한 무과에 급 제하여 남대병절제교위를 역임하고 아들 형제를 두어 장남 빈무 (斌富)는광해조에무과에급제하여창신교위,차남민록(敏祿)은 임란에창의하여순절하고고암공파의파조가된다. 후손들은경북청도와경산등지에세거한다. 고암공의휘는민록(敏祿,21世)으로초휘는원록(元祿)자(字) 는 국서(國瑞), 號는 고암(古庵)이다.용사지란(龍蛇之亂,임진왜 란)에창의하여순절,경주부서면화천(현건천읍화천리)에안장 하여후손들은경주건천읍화천리에집성촌을이루고있다. 관포공(灌圃公)의 휘는 홍미(弘美), 초휘(初諱)는 경립(敬立, 자(字)는군언(君彦),호(號)는관포(灌圃)다. 대사헌을역임하고사후에가선대부동지의금부사홍문관예문 관 대제학에 증직된 휘 휘(徽)의 아들 삼형제 신겸(信謙, 후손 참 의공파,학수공파,사정공파,고암공파),호겸(好謙),종겸(현감공 파)중둘째호겸(好謙)의증손이다. 증조부 호겸은 문과에 올라 호당에 뽑혔고,승정원좌승지,이조 참의,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조부 사공(士恭)은 어해장군 첨 진절재사이고,아버지는 선교랑 군자감 참봉,증 호조참판겸 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휘 현룡(顯龍)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로현감환의따님이다. 1571년인천본제(本第)에서태어나문장이뛰어나당대의문사 이식 등과 교유하였다. 선조 38년(16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 원 정자가 되었으나 어머님이 별세하시니 일찍 아버님을 여윈 슬 픔이겹쳐애통으로건강을손상함이도(度)에지나쳤다한다. 상(喪)을 마친뒤 다시 조정에 나아가 전적,응교,수찬,교리,정 언 등을 역임하였고,1622년에는 월사 이정구가 명나라 사신의 영 접사가 되었을 때 그 서장관이 되어 문명이 중국에까지 떨치기도 하였다. 그 때 광해군이 생모 김씨를 추존하려 하자 준열(峻烈) 상소로 그불가함을진술(陳述)하여조정공론이숙청(肅淸)되었으나연 이어영창대군을죽이고인목대비를유폐하는옥사(獄死)가일어 나자결연히벼슬길에서물러나인천으로퇴거(退去)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부름을 받아 좌부승지를 거쳐 창원부사로 나 갔는데 지방관중 치적이 제일이라 하여 경주 부윤으로 승진하였 고, 그후 도승지, 이조참판을 거쳐 양양부사로 나가 장장 만여언 (萬餘言)에 달하는응지소(應旨疎)를 올리니세상에서한나라가 의(賈誼, 정치개혁의 제창자이자 이름난 시인)의 치안책(治安策, 상소)에견주었다. 병자호란에 실수(失守)의 소식을 듣고 여러차례 땅에 엎드려 통곡하다가 병을 얻어 서산 동암(銅巖) 촌사(村舍)로 돌아와 문 을 닫고 정조를 지키다가 1642년 6월 12일에 돌아가니 향년 72세 이다. 장남 대익(大益)은 인조 원년 (癸亥, 1623년) 문과에 올라 성균 전적과병조정랑을역임하고아들세장(世章),세욱(世煜)형제를 두니 장남 세장은 통덕랑이고,차남 세욱은 통덕랑으로 그의 증손 사증(士曾)이성균관전적이되어전적공파의파조가된다. 관포공의 차남 대이(大 視 )는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세마 공파 파조가 되고, 삼남 대항(大恒)은 계당공파(季堂公派), 사남 대순(大順)은진사공파,오남대항(大恒)은월봉공파이다. 관포공의후손들은충남보령,부여,서산에세거한다. 전적공(典籍公)의 휘는 사증(士曾)으로 관포공(휘 홍미)의 증 손이다. 숙종41년(乙未, 1715년)에 태어나 봉정대부 성균관 전적 으로후손들은보령과부여등지에세거하고있다. 세마공(洗馬公)휘는대이(大 視 ),字는중열(仲悅),호(號)는동 호(東湖)이다. 관포공의 둘째아들로 선조29년(丙申,1596년) 태어 났다. 인조11년(癸酉,1633년)에 진사시에 올라 통훈대부 세자시강원 보덕행(行)익위사(翊衛司)세마(洗馬)로후손들은관직을따세 마공파로세계를이루고충남서산등지에세거하고있다. 계당공(季堂公)의 휘(諱)는 대항(大恒),관포공의 셋째 아들이 고,세마공의동생이다.후손들은경기도광주에세거한다. 진사공(進士公)의휘는대순(大順)으로성균진사(成均進士)로 관포공의넷째아들이다. 아들세견(世堅)은용양위부호군이고,손자성관(聖寬)은절충 장군 용양위 부호군,현손 치규(致圭)는 참봉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천군비인(庇仁)등에세거를이루고있다. ▶7면으로계속 뱚관향조 약사 월성박씨(月城朴氏) 월성재,경주남산아래삼릉옆월성대군단소아래에있다.1322㎡(400평)의넓은부지에건평200여㎡(약60여평)으로본당(月城齋 ),동재(景慕齋),서재(惠和齋)삼문(景源門)과화장실관리사(右)가있다. 월성박씨는신라를건국한박혁거세왕을박씨의시조 로하여신라제54대경명왕의제8왕자인월성대군박 언의(朴彦儀)를월성박씨(月城朴氏)의분관조로한다. 경주남산(금오산)서쪽기슭에제단을설단하고고려 때좌사간을지낸31세(世)박견(朴甄)및지하(支下)10 위의제단도 좌측에 병설하였으며 그 아래월성재(月 城齋)재실을 두고매년 음력3월15일 대군과11위선 조의제향을봉행하고있다. 전국의3만5천여종친은인천장아산,동래군위경주 등지에서숭조정신을바탕으로왕손의긍지를갖고치 성을다하며종족간에종의를돈독히하고있다. 관향의유래(貫鄕由來) 월성대군단소,경주남산아래에있다. 월성박씨약사(略史) 월성(경주)박씨종친회관,인천장아산묘원입구이있다. 월성대군을비롯한11세의문헌과묘소가실전되어경주시삼릉근처남산기슭에설단향사한다. 중군사정박구선생의묘,조선이개국하자인천장 아산에은거중태종의출 사권유에도 불응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그 묘소는 장아산 종중 묘역(인천광역시지정문화재기념물제62호)에있다. △참의공파( 핫 議公派) △학수공파(鶴壽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고암공파(古庵公派) △관포공파(灌圃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세마공파(洗馬公派) △계당공파(季堂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