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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8월31일 토요일 6 (제212호) 관향조 종친회 공(公)의휘는눌생(訥生)이요자는돈지(惇之)이며호는운수 (雲쑴 )라 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갑인)에 전서공 아드님으로 태어나 1409년(태종 9·기축)에 무과에 급제했다. 1422년(세종 4) 훈련원판관에제수되어그해윤12월11일세종은야인을물리친 공으로지여연군사이안길을상줄때공(公)을대신보내어그공 을치하하고옷한벌과선온(宣 좍 )20병을하사했다. 그리고 세종 6년 갑진(1424)6월 22일(을축),박눌생을 보내어 이징옥 등에게 말 등을 하사하고,김득해 등은 새 관직을 제수하 다. 실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훈련 판관(訓鍊判官)박눌생(朴 訥生)을 보내어 경성 첨절제사(鏡城僉節制使) 이징옥(李澄玉) 에게내온(內 좍 )과옷의겉감과안찝,여름옷한벌,안장갖춘말 을하사하고,또 유방천호(留防千戶)박영생(朴榮生)븡박귀부(朴 貴富)에게는 각각 말 1필 씩을 하사하였으며,도진무(都鎭撫)김 득해(金得海)는호군(護軍)으로,군인(軍人)김을신(金乙辛)븡김 상남(金尙南)븡김원생(金元生) 등은 부사정(副司正)으로 제수 (除授)하였다.’ 세종9년1427년(丁未)에서산군수,세종14년1432(壬子)12월 지여연군사,세종 15년 1433년(癸丑)9월에 화성(순성)첨절제사, 1440년(庚申)6월에평안도진무와서산군사를지냈다.당시보령 (保寧)은경인년(1410)부터바다도적의해를입어경진년(1400) 에봉당(鳳堂)에성을쌓고는이를방어하는곳으로삼았다.그러 나 성지(城池)가 얕고 좁은데다가 험준하고 조격(阻隔)한 공고 (鞏固)함과우물을보유하는편리한점이없더니,세종경술년가 을에순찰사최윤덕과감사박안신으로더불어함께성동쪽일리 (一里)지점당산(唐山)남쪽을살펴면밀한계획으로몇달되지 않아 축성을 마쳐 방비(防備)를 튼튼히 하니 도적으로부터 안심 을하게되었다. 그리고 보령객관과 동헌 북쪽에 있는 어풍정(馭風亭) 기문을 지은바 있는데 “신해년에 온천(溫泉 본관)정공(鄭公) 대(帶)가 이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왔는데,그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를 잘 다 스리니, 백성들이 즐겨 역사에 달려가서 관우(館宇)와 공청(公 廳)을 한 결 같이 모두 신축하였고, 또 동쪽 봉우리 위에 정자를 짓고는 도식(塗飾)과 단청(丹靑)을 이미 마치고 나서 나에게 명 명(命名)해 주기를 청해 왔는지라, 내 그 경치를 보려고 처음 정 자 위에 올라 보니,북쪽으로 높은 산에 의거하고,남쪽으로는 큰 들을내려다보고있어누정의마루가시원하고처마도나는듯이 높이솟아서마치구산산마루에올라낭풍(산이름)을제어해보 는것같았으므로,이름하기를어풍(馭風)이라하였다고하였는 데, 해가 오래되고 퇴락하여 현감 박적손(朴迪孫)이 이를 중수 (重修)하니,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이름을 무이정 (撫夷亭)이라고고쳤다.”하였다. 1443년(癸亥) 김해도호부사 재임 시에는 객관이 화재로 소실 되어중건하고안숭선(安崇善)이기문을지었다. 1447년 훈련원지사, 1448년(戊辰)에 호조참판에 올랐다. 39년 의 관직생활을 끝으로 1449년(己巳)8월 7일 壽 76세의 일기로 하 세하니전북완주군용진면상삼리각씨산에안장되었다.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煮 )는 충간(忠 簡)으로고흥(高興)숭양사(崇陽祠),장흥세덕사,경산(慶山)율 산서원(栗山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배위는 양천인 중추부 사 허해의 따님이다. 후손들은 공의 관직을 따를 땐 참판(參判) 을,시호를 따를 땐 충간을 파명으로 참판공 또는 충간공파라 하 여파조가되었다. 참판공(휘 눌생)시조는 신라시조왕(휘혁거세)이고, 경명왕의 맏아들밀성대군(휘언침)은관조(貫祖)이다,밀성대군의8세태 사공(太師公)의 휘는 언부(彦孚)이다.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문과에급제하여최충과함께태사(太師)를지냈고중서령문 하시중도평의사를역임하였으며밀성부원군으로피봉되었다.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또는 고려주석(高麗 柱石)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 다.유지는경북청도군풍각화산에있다고하나확증이없다. 효신(孝臣)은과거에급제하여문하시중이되었고평장사로서 중국에사신으로갔을때천자가예로서대우하여치사하였고본 국에 돌아와 졸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하고 인종묘 에배향하였다.의신(義臣)은공부상서로서종방인양신(良臣:彦 祥의 아들), 직신(直臣:彦仁의 아들)과 더 불어 세상에서 삼언사 신(三彦四臣)이라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장군 도검 사병부상서를역임하였다.공은문무에재주가겸비하여고려예 종(1107년) 2년에 윤관과 같이 여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 공신으로추존되었고시호를충열(忠烈)이라사시하였다. 육화(育和)는육경(育慶)의아우이고육권(育權)의형으로공 필(公弼)의아들인데병부상서이다.육화((育和)의아들윤공(允 恭)은내부시중과시어사를지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상례(尙禮), 광례(光禮)이다. 상례(尙禮) 는고려조의문과정언으로좌상공휘춘의부친이고,광례(光禮) 는 문과 급제하여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으며 규정공의 증조 부가된다. 밀성군(휘광례)의아들은유효(惟孝)이고손자의휘는흥(興) 이다. 증손자의 휘 현(鉉)은 사헌부규정으로 규정공파의 파조가 된다. 아들 문유(文有)를 두었는데 고려조(高麗朝)에 전리좌랑 (典理佐郞)과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배위는 벽진인(碧 珍人)밀직(密直)이대(李玳)의따님으로3남2녀를두었다.장자 는 상장군 사경(思敬)이고 차자는 간의공파 파조인 휘 사인(思 仁),셋째는군수공파파조휘사민(思敏)이다. 상장군공 휘 사경은 1312년(고려 충선왕 4·壬子)에 태어나 문 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 겸 상장군(上 將軍)에 올랐다.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이씨(李氏)와의 사이에 1342년 (고려 충혜왕 3)에 아들 침(忱)을 낳았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의판 사(典儀判事)에 올랐으나 1392년(공양왕 4) 7월에 이성계(李成 桂)가거사를도모하여새정부조선국(朝鮮國)을개국하여고려 조의 국운(國運)이 끝나자 공께서는 이왕조(李王朝)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고려조의 명신 재상 71명과 더불어 망국의 한 (恨)과 슬픔을 간직한 채 송도(松都· 고려국의 도읍으로 지금의 개성)를 떠나 만수산(지금의 개풍군 광덕산)으로들어가다 부조 현(不朝峴·두문동 72현이 만수산으로 들어갈 때 이곳에다 의관 을 벗어 걸어 놓고 넘어갔던 고개라 하여 지어진 고갯길 이름)에 올라 신조불참동맹(新朝不參同盟)을 맺고 조복(朝服)과 관대 (冠帶)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 가불사이군(不事二君)의충절을지켰다. 배위(配位)정경부인밀산박씨(密山朴氏)는1343년(충혜왕4) 에밀산군(密山君)휘밀양(密陽,또는瑪 )의따님으로태어나전 서공(典書公)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시고는 1381년(우왕 7)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졸(卒)하시니 위의 봉서산(鳳棲山)자락 축 좌(丑坐)에모시었다. 참판공은 정부인 양천허씨와의 사이에 아들 경신(景愼)을 낳 았다. 자(字)는 자흠(子欽)이고 호는 둔수(遯 쑴 )로 배위는 정부 인경주이씨이다.1414년(태종14)에 출생하여 1438년(세종20)25 세에등제(登第),경주판관(慶州判官),1453년(단종)훈련원사직 (訓練院司直)으로 재직 중 세조의 왕위찬탈에 종형(從兄) 청재 공(淸齋公 諱 審問)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位)에 뜻을 같이 하여곧은마음과숨은절개는생육신과비유되었다.전주소양산 아래은거(隱居)하며생을마쳤다.묘소는전주동12리(全州東十 二里) 소양산 (韶陽山) 표동(瓢洞) 계좌(癸坐)이나 실전(失傳) 되어 아버지 참판공 묘하(先考墓下)에 설단(設檀)하였다. 철종 (哲宗),병진(丙辰)1866년에비로서호조판서(戶曹判書)를증직 을 받고 충양(忠 翔 )의시호(諡號)를받았다. 아들 근손(根孫), 정손(楨孫), 문화(文華), 창손(昌孫), 군손 (君孫),신손(新孫)등 6형제를 두어 크게 번성 하였으나현재장 남 근손(根孫), 차남 정손(楨孫)의 후예가 선영을 봉사(奉事)하 고있다.장남근손(根孫)은세종16년(甲寅,1434)에태어나세조 1458년(戊寅) 봉사(奉事)를 지냈고,호(號)는 경근당(敬謹堂)이 다.차남정손(楨孫)은세종18년(丙辰,1436)에태어났다.字는사 윤(士胤), 호는 충재( 齋)이다. 1463년 성균 유학(成均儒學) 으로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서 겸예문(兼藝文) 정난종(鄭蘭 宗)등과함께경서(經書)를강(講)하였는데이자리에는왕세자 (王世子)와 내종친(內宗親)과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 (鄭麟趾)븡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븡영의정(領 議政) 신숙주(申叔舟)븡우의정(右議政) 구치관(具致寬)븡우참찬 (右參贊) 최항(崔恒)븡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원형(朴元亨)븡이 조판서(吏曹判書)김담(金淡)븡이조참판(吏曹參判)홍응(洪應) 븡병조참판(兵曹參判) 김국광(金國光)븡대사헌(大司憲) 서거정 (徐居正)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성균관 직강(直講), 사인(舍 人), 검상(檢詳)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셋째 문화(文 華)는학생이고손자동상(東尙)에이르러무후(无后)이다.넷째 창손(昌孫)은지제교(知製敎)를지내고호조참판에증직되었고, 다섯째 군손(君孫)은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여섯째 신손 (新孫)은부호군(副護軍)이다.그러나넷째창손,다섯째군손,여 섯째 신손 등은 후손들이 수단을 제출하지 않아(未單),이들 6형 제중현재종사에참여하고후손들이전해지는분은첫째경근당 과 둘째 충재공( 齋公)뿐으로 이번 약사에는 이들 형제를 중 심으로서술하고훗날종사에밝은후인이나타나길기대해본다. 경근당(휘 근손根孫)은 아들 빈(彬), 연( ),조문(肇問)삼형 제를두었다.장남빈(彬)은성균생원으로아들운달(雲達),운열 (雲烈),밀예(密裔),원창(元昌)등사형제를두었다.그러나차남 운열(雲烈)의 후손들은 남양주, 삼남 밀예(密裔)의 후손은 경북 영덕군 병곡면 백석리.사남 원창(元昌)은 부안 현감을 지내면서 후손들이부안군동진면증산리등에각각세거하고있다. 성균생원의 아들 운달(雲達)의 字는 달지(達之)호는 요산(樂 山)으로성종계해(癸亥,1491)년에서울에서태어나1516년26살 에무과에등제하여여러차례승진하여선전관사포서별검봉상 시주부(종6품)에이르렀고직분을받듦에공정하게처리했다.아 첨하거나 물러나는 태도가 전혀 없어 동료들이 모두 공경하면서 꺼려했다.이후 “벼슬은 나의 학문을 펼치고 나의 뜻을 행하여 임 금에게충성하고백성에게은혜를베푸는것이다.그렇게되지않 는다면내가좋아하는것만못하다.”고하고마침내벼슬을버리고 호서(湖西)의 청주로 물러나 살면서 경전에 힘써서 그 앎을 지극 히하였고자신에게돌이켜실천하였다.뒤에또다시영남의자인 현 대원리(현 진량읍 대원리)로 옮겨 은거하며 성리(性理)를 탐 구하며오직경서(經書)를가까이하며영달을꿈꾸지않았다. 부인원주원씨와의사이에한명의자식을낳았는데,성균생원 을 지낸 휘 근손(謹遜)이다. 자(字)는 춘장(春長) 호는 송재(松 齋)이고 후주당 김부필(後 姸堂 金富弼), 읍청정 김부의(邑淸亭 金富義)등과 도의(道義)상교(相交)하는 등 당시의 거유들과 함 께하는등 학문 또한 뛰어났으며 손자 응득(應得)이 귀(貴)하게 됨으로서통정대부호조참의에증직되었다.그리고4남을두었는 데장남총(叢)은일찍사망하였고,차남번(蕃)은무과에급제하 여 태천현감을 지냈고, 승정원좌승지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 며,삼남난(蘭),사남포(苞)는가학(家學)을이었다. 송재공(휘 근손)의 차남 번(蕃)의 자(字)는 성보(盛甫) 호는 위당(威堂) 또는 정재(貞齎)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사복시주부, 청엄도찰방, 통훈대부 행 태천현감, 훈련원첨정, 절 충장군, 칠포만호를 지냈고, 아들 죽고공 휘 응득이 정유재란에 크게 공훈을 세우고 귀(貴)하게 됨으로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추증되었다.아들응득(應得) ·광득(光得)·천득(天得)삼형제를 낳으니 모두 번성하여 후손들 은정재공파라세계를이룬다. 장남 응득(應得)의 字는 응직(應直)호는 죽고(竹皐),선조 무 인(戊寅, 1578년)에 태어나 14세에 사월 유시번(沙月 柳時蕃)선 생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 를 모시고 피란하였다.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20 세가 되어 창의(倡義)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곽재우 장군에게 달 려갔다.선조31년(1598)1월에 도산성을포위하여왜적이군량부 족으로많은사자(死者)를내었으나때마침큰비로인한인마(人 馬)의동사(凍死)때문에경주로돌아왔다. 이때에교력부위(效力副尉)에제수되었다.8월에명(明)의마 귀제독(麻貴提督)이2만4천군으로남하하여울산도산성의가등 청정군을 공격할 때에 권 방어사군이 이에 분속(分屬)되어 도산 성을 공격하였으나 왜군이 성(城)을 지키고 나오지 않아서 그대 로 퇴진(退陣)하여 돌아와서 승의위사(承義副尉,정8품)에 제수 되었다. 뱚파조별 약사 규정공후참판공(충간공)파 원모재,참판공파재사(齋舍)이다. 참판공묘,전북완주군용진면상삼리 참판공(충간공)파 파조는 규정공(휘 현)의 현손으 로 호조참판을 지낸 휘 눌생(訥生)으로 자는 돈지 (惇之)호는운수(雲쑴 )이다.호조전서(戶曹典書)휘 침의3남으로1409년(조선태종9년)36세에문과에 급제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시작으로두루요 직을거쳐세종때에훈련원지사(訓練院知事)와호 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시호 충간(忠簡)을 받 음에 관직은 참판이요 시호는충간이라 후손들은 참판공(충간공)파라하여세계를이루고있다. 이후후손들은경북경산,전남고흥,보성,전북부 안으로각각세거지를옮기면서경산문중,고흥문 중, 부안문중 등 삼문중(三門中)을 중심으로 종사 (宗事)가 이루어지고,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삼리 관전마을 소재 ‘원모재’와 마을건너 각씨산의 참 판공묘소세일사또한이들삼문중이차례로제수 를마련하고정성스럽게선영봉사를하고있어이 번호에는참판공(충간공)과그후예들을소개해본 다. 참판공(충간공)파연원淵源) 선원세계(璿源世系) 참판공(충간공)파세계(世界) 원모정과추모당,경북경산시진량읍마곡리산68번지 경근당휘근손,생원공휘빈단소 죽고공(휘응득)묘소=경북경산시진량읍다문리산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