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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7월31일 수요일 6 (제211호) 기 획 판서공은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를지낸휘윤수(允守)셋째 아들로서 휘는 소(蘇)이다. 유년시절에는 고려가 기운이 다하여 문을 닫고 조선이 건국된 초기이다.고려 말 조선 초 혼란한 시기 에 중형 진( 풂 ,참의공파조)과함께지금의대전으로내려와은거 하며경서(經書)를가까이했다.조선초진사시에오르고감찰이 되어경기지역기근에행대감찰(行臺監察)로파견되어수령들의 배식 등을 면밀하게 감찰하여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 였고,이어 좌랑,의천·은산군사를 지내고,손자 육봉공(휘 우)이 귀(貴)하게 됨으로서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이어 증손 사암(휘 순)이영의정에오르니이조판서에가증(加贈)되니이후후손들 은판서공파로세계를이루고있다. 부인 고령오씨(高寧吳氏)는 좌랑 휘 치(治)의 따님으로 슬하 에 인흥(仁興)·의흥(義興)·예흥(禮興)·지흥(智興)·신흥(信興) 등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휘 인흥) 셋째(휘 예흥)는 이북지역 에,다섯째(휘인흥)은소재가불분명하고현재종중의구성원은 둘째 휘 의흥(참의공파),넷째 휘 지흥(찬성공파)의 후예들이 대 전 광주 전남지역에 큰 집성촌을 이루며 각종 행사에 두루 참석 우의를다지고있다. 참의공은 판서공의 둘째아들이다. 휘는 의흥(義興)으로 무과 에급제하여부호군(副護軍,종4품)을지내고병조참의에제수되 었다. 부인 전의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진손 (眞孫)은 부사맹(副司猛)이고 차남 철원(哲元)은 직장(直長)으 로손자수춘(秀春)에이르러무후(无后)이다. 부사맹휘진손의아들문림(文林)은참봉,손자근(瑾)은또한 참봉으로아들둘을두었다.장남팽조(彭祖)는승훈랑천문습독 관(天文習讀官)과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함으로서 부사과공 종 중, 차남 숭조(崇祖)는 장사랑(將仕郞)으로 장사랑공 종중으로 각각세계를잇는다. △부사과공파(副司果公派) 부사과공의 휘는 팽조(彭祖)이다.참봉 휘 근(瑾)의 아들로 자 (字)는 기수(耆쑴 ), 승훈랑 천문 습독관(天文習讀官)과 부사과 (副司果)를 역임했다. 임진왜란에는 통사(通事)로서 외적의 동 태를보고하는등작전에도움을주기도하였다.특히5대조판서 공의묘비를세울때감독역을맡아위선사업에최선을다했다. 부인 밀양손씨와의 사이에 엄(儼)·수(修)·희(僖)·신(伸) 등 4 형제를 두었다.장남 엄(儼)은 학생이고 그의 아들 경립(慶立)은 공조좌랑으로 증손에 이르러 무후이고,차남 수(脩)는 봉사인데 아들 대성(大成)에 이르러 무후이고, 셋째 희(僖)는 음직(蔭職) 으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고, 근면과 성실함으로 많은 재산을 일으켜 베풀기를 좋아해 향리의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지 않음이 없으니 인자한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다. 수직으로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성립(成立)은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 다. 손자 면(沔)은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이고 필(泌)은 수직으 로 통정이다. 부사과공의 넷째 신(伸)은 학생이고 그의 손자 변 ( 憫 )이수직으로첨추(僉樞)에제수되었다.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장사랑공휘숭조(崇祖)는참봉휘근(瑾)의차남이다.아들둘 을두었는데장남령(伶)은봉직랑(奉直郞,종5품),손자의립(義 立)은통덕랑(通德郞,정5품)이다. 차남준(俊)은학생이고,셋째일(佚)또한학생이다. 참의공의 후예는 대전 문지동을 중심으로 세거하며 과거와 공 명에연연하지아니하고경서를가까이하며500여년을세거하며 토반으로서의무를다하였음을족보를통해알수있다. 찬성공파는 의향(義鄕)이라 하는 호남의 고장 특히 광주지역 에절의(節義)사상을심어준가문으로꼽을수있다. 찬성공파의 파조(派祖)는 휘 지흥(智興, 1411~1489)으로 호는 회암(懷庵)이다.1411년 고려조에 성균진사로 감찰과 좌랑 의천, 은산군사를 역임한 판서공 휘 소(蘇)와 고령오씨 사이의 오형제 중넷째아들로충청도회덕에서태어났다. 세종29년 정묘(丁卯,1447)에 진사시에 올라 성균 진사가 되었 다.그러나수양대군이어린조카의왕위를찬 탈하는정치적인혼 란속에낙향하여현광주봉황산(鳳凰山)아래집을짓고순수함 을보전하며절의를지키며깨끗이살았다.학문이뛰어나권람이 수차례에 걸쳐 세조에게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곧은 선비 의 삶을 살았다.특히 아들의 훈육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던 탓 에 아들 삼형제븮휘 정(禎),상(祥),우(祐)븯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 려 이들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에는 부자삼소(父子三蘇,蘇洵,蘇 軾<蘇東坡>,蘇轍은父子兄弟사이이며,묶어서븮三蘇븯라부른다) 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삼박(兄弟三朴)이 있다고 하였다. 찬성공은 아들 육봉공의 귀(貴)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 고 이어 손자 사암공(휘순)의 귀(貴)로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左贊成)에 추증되어 찬성공파라 하고 아들 삼형제에 이르러 하 촌공파,문간공파,육봉공파로각각분파되어세계를이룬다. △하촌공파(荷村公派) 하촌공의휘는정(禎,1467~1498),자(字)는창국(昌國),호(號) 는하촌(荷村),성균생원으로학문이뛰어나점필재김종직선생 이호남을살필때한번보고기이하게여겨예모(禮貌,예절에맞 는 태도)를 차려 말하기를 “참으로 재상(宰相)재목(材木)이다” 하였으나아쉽게도31세의젊은나이에 세상을등져아쉬울뿐이 다.그의후손들은하촌공파(荷村公派)로세계를이루고있다. 하촌공의 아들 호손(虎孫)은 효릉(孝陵, 조선 인종과 인종의 비 인성 왕후의 릉) 참봉(參奉)이고, 손자 휘 대수(大壽)의 호는 송계(松溪), 정략장군 적량 만호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에는 권 율장군 휘하에서 이치대첩의 대승을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 여 권 장군의 이치대첩비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슬 하에지효·지충형제를두었다. 장남휘지효(之孝)는문사(文詞)가맑고필획(筆劃)이굳세어 힘쓰면 과제(科第)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도 응시하지 않아 유일 (遺逸,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 될 수 있는 학자)로 장예원 사평, 사복시정, 사헌부 감찰, 지평으 로불렀으나나아가지않았다.임진왜란에왜구가창궐하여여러 고을이와해되고남평현감마저적에게함락되자지역의원로들 이관찰사에게천거하여위급한상황에남평현감직을맡아피난 간백성들을불러모으고도망간군사를수습하는한편양식을모 아 수비 책을 세워,적 수 천명이 남평 고을 접경지역으로 침범해 오자매복하여선봉을꺾으며큰공을세웠으며,정묘호란에도창 의하는 등 충(忠)과 의(義)를 숭상하고 뛰어난 학문에 인근의 모 든사람들이추앙했다. 만년에하동에강당을짓고손수버드나무여섯그루를심고그 취향을 스스로 즐기면서 조용히 덕을 기르고 유연자적(悠然自 適)하니문인들이육류정(六柳亭)선생이라칭하였다. 차남 지충(之忠)의 호는 낙호(樂湖), 통덕랑(通德郞)으로 그 의 아들 함(涵)은 학문이 뛰어나 그 실천함이 본보기가 되었고,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폐위(廢位)하는 패륜 이있어이를통절(痛切)히여겨과거의뜻을접고시사(時事,당 시에 생긴 모든 세상일)도 말하지 않으며 문을 닫고 자정(自靖) 하여호를둔헌(遯軒)이라하였다. 둔헌공은 아들 둘(정현·태현)을 두었는데 장남 정현(鼎鉉)의 호는 송파(松坡)이다.그의 아들 치태의 호는 하곡(荷谷)으로 숙 부하담처사로부터종제(從弟)치구,치화등과함께공부하여숙 종 정묘(1687)에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니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뒤늦게 분쟁(당파싸움)의 잘못됨을 깨달 아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은둔하며 뛰어난 문장으로 유고 (遺稿)를남겼다. 둔헌공의 차남 태현(台鉉)의 호는 하담처사(荷潭處士)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김에 좌우(左右)로 보살펴 드리고 남에게 장점을 취하여 자기를 이루니 당시 일대의 완전무결한 분 이라 칭했다. 학문이 뛰어나 자질(子姪)가르쳐 성취시키니 하담 처사라 하였다. 그의 장남 치구(致久)의 호는 학산(鶴山)으로 우 암선생에게 나아가질의하여칭찬을받기도 했다.1682년생원이 되어아우치화와더불어성균생원이되어성균관에들어가문망 (文望)이높아기대가높았으나아쉽게도수명이길지못했다.진 사민준창,아우진사치화,족제생원론등과함께연명으로청원 하고우암송시열선생의유배지정읍으로가우암의뜻을지켰다. 차남주곡공(舟谷公)휘치화(致和)는진사시에합격하였으나 사색당파싸움이갈수록치열해지고소론과노론의사대신(四大 臣)이 죽어가는 등 당쟁의 패악은 뜻있는 선비들이 벼슬에 나가 는일을두렵게만들어그역시은거하며학문을연구하고도(道) 를 닦는 일에만 전념하며 주옥같은 시문집 주곡유고(舟谷遺稿) 를남겼다. 문간공의 휘는 상(祥,1472∼1530),자는 창세(昌世)이고,호는 눌재(訥齋)이다.광주의 방하동(芳荷洞)에서아버지지흥(智興) 과어머니 계성 서씨(桂城徐氏)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어머 니서씨부인이특이한꿈을꾸었는데아버지찬성공의나이63세 가되던어느날부인서씨와함께고향을찾아가는길장성입암 산 갈재를 넘다 산 아래 산막에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이날 밤 부인서씨의꿈에입암산위에서큰바위가굴러와서씨의치마폭 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이듬해 1475년 5월 18일 둘째아들이 태어났다.찬성공이이아이의이름을태몽에따라아명을입암으 로하다뒤에상(祥)이라했다.어려서부친을여의고백씨(白氏) 하촌공(荷村公)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났 고, 성장하여서는 자신이 공부에 힘을 써서 경전(經典)과 역사 (歷史)에널리통달할수있었다. 뱚파조별 약사 충주박씨판서공파(判書公派) 충주박씨는고려부정을지낸휘영을관조로하고있다. 성종5년(甲午, 성화10년, 서기1474년)에 첨정 박영창이 처음으로수보하였는데상계를명시하지않고븮후에더 아는 학자를 기다린다븯는 단서를 남겼으나 1400여년이 지난지금에와서도고증할만한역사적자료가없어우 리나라족보사상처음으로수보한븮성화보븯에따라‘영’ 을관조로세계를이어오고있다. 그 후 관조 휘 영의 아들 신(臣)이 고려 때 검교신호위대 장군을지냈으며손자원숭(元崇)은삼사우사를역임하 고 첨의평리를 지낸 아들 득승(得升)과 함께 기세를 일 으켰다.고려말에와서는권신임경미의횡포로탄핵했 던 팔세손 광리(光理)가 개성소윤을 역임, 사복시정에 증직되었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휘 윤수(允守)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事)를 역임하였으나 후사가 없었 고, 사헌부감찰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를 지냈던 차남 진( 풂 )과은산군사를역임한 셋째소(蘇)형제가 어지러 움을피하여충청도덕진현가장골(현대전광역시서구 도마동)로은거하여살게되어이로서충주박씨의세거 지를 이루게 되었고,관조 이하 팔세의 묘소는 개성 동 문밖에모셨는데불행이확인 할 수 없어 대전도마동의 추원사에위패를모시고있다. 이번호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판서공파는 서적점록사 (書籍店錄事)를 지낸 휘 윤수(允守)셋째 아들 휘 소(蘇, 판서공)의후예를말한다. 판서공의분암영사암전경,대전광역시유성구문지동466번지 판서공파약사(略史) 참의공파(參議公派) 참의공재사염수재(念修齋)(대전광역시유성구전민동산5-1) 찬성공파(贊成公派) 찬성공재사추원재(광주광역시서구서창동사동마을(절골)) 하촌공재사추모재,절골마을 문간공파(文簡公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