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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6월30일 일요일 6 (제210호) 호국보훈의 달특집 베트남전쟁의 파병은 196 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전투 부대를 파병하여 참전 한사건을말한다. 정부의 파병 결정에 따라 제1차 파병으로 제1이동외과 병원요원130명과태권도교관단요원10명등140명이19 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하여 22일 남베트남의수도사이공에도착하였다.이후제1이동외과 병원은붕타우에주둔하고,태권도교관단은육·해군사관 학교와 육군 보병 학교에서 남베트남군을 지도하게 되었 다. 제1차파병에이어서미국과남베트남정부로부터추가 파병을요청받은정부는2차로후방지원과건설지원임무 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하기로 결 정하고‘국군의해외추가파병에대한동의안’이국회에서 가결되자, 경기도 현리에 위치한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 서‘주월한국군군사원조단본부’를창설하여평화를상징 하는뜻의비둘기부대로명명하였다. 창설된한국군군사원조단은3월10일인천항을출발하 여16일사이공에도착하였으며,사이공동북방22㎞지점 의디안에주둔하였다.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의 베트남 상황은 미국의 강력한 폭격에도 불구하고,호치민 루트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남파가 계속되면서 남부의 전 지역에서 지 상전이가열되고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에 1개 사단 규 모의전투부대파병을요청해왔다.당시미국은본토의예 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의 일부를 베트남전에 투입하였기 때문에주한미군2개사단도언제남베트남으로이동할지 모르는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파병 요청을 긍정적으로검토하고있었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브라운 대사에게 제시하였던 요 구 사항은 1965년 5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워싱턴에서 개최된한·미정상회담에서대부분타결되었다.이에따라 정부는 8월 13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 여단의파병을 결정하였다.이어서10월 12일여의도광장 에서 박정희 대통령 임석하에 파병되는 수도사단의 환송 식이열렸으며,수도사단은11월1일까지퀴논에,제2해병 여단은 10월 9일 캄란에 도착함으로써 제3차 파병이 마무 리되었다. 한편 남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눈부신 활약이 계속되고 있는가운데전투병력부족으로애로를겪고있던미국정 부는 베트남의 “작전 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내리고한국군전투병력의증파를요청하였다.한 국 정부에서도 “5만 명 선 까지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 쳐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와 제9사단의 파 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기계화사단 (맹호부대) 제26연대는4월15일퀴논에상륙하여수도사단의통제하 에들어가고,제9사단은10월8일까지닌호아일대에전개 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미국내에서는TV와신문 등언론의영향으로반전여론이고조되고있었다.이에따 라1969년1월미국의대통령에취임한닉슨은남베트남에 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 력을 철수시키면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이 수행하게 한다.”는‘베트남전쟁의베트남화정책’을추진하고있었 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일부 병력을 철수시키자,전투 부대 를 파병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일랜드 등 연합국도 이에 동조하여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1972년 초에는100여명정도의상징적인병력만을잔류시키고있 었다. 그러나 당시의 주 베트남 한국군의 병력은 47,860명 을유지하고있었다.(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월남전에의 참전은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외화 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며한반도안보문제와관련,한국군현대화를골자 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고, 전투 경험을 얻 었다. 반면, 파병된 대한민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 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WIA)를 기록하고, 31만 명이생존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자를 낳았으며 화공약품 후유증으로귀국후병사자가다수발생하였다.지난14일 광주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척 면회를 하였는데 입원 환자대부분이70~80대노인으로월남전참전군인들이었 다.이들의고통스러운신음소리는당시를생생하게전하 는듯하여귓전을울린다. 월남전파병후온갖고통과함께하면서도종친회에봉 사하고있는종친이있다. 함양박씨 구소명 종중의 재무를 오랫동안 보아오면서 수억대의 재산관리를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종중의 수익 사업에공헌하는등종중을윤택하게한박수호현종을소 개해본다. 박수호(朴秀鎬) 현종은 1943년 8월 2일, 충청북도 괴산 군 감물면 광전리에서 선대로부터 유학의 가풍을 이어온 한학자가정에서8남매중2남으로태어났다. 함양박씨밀 직부사공(4파)후구당공(휘朴世榮)31세손이다. 가학과 신학문을 배우면서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한 수 호 현종은1964년2월12일맹호부대일원이되어1965년1 0월1일~1966년10월20일까지파병되어참전했다. 낯설은이국땅퀴논에주둔하여허허벌판에임시텐트 로써oo처 사무실을꾸렸으나,밤사이폭우로인하여힘들 게 설치한 사무실 텐트가 망가지는 사례가 수차 발생하는 등악조건에서적군과사투를해야했다. 상황실(전시 시 아군과 적군의 전쟁 상황과 전과 및 아 군 피해 등 종합하는 업무)근무 명령을 받아 야간 전투상 황을수시로보고받고,상황일지를작성하고인쇄하여비 밀문서로 분류,상급부대 및 예하부대에 발송하는 업무를 취급했다.적군의 동태와 아군의 실태를 정확히 분석해야 승리를 할 수 있듯 상황실 근무는지휘관들의작전에도큰 영향을끼쳤기에휴전이없는매일매시간이전투의한장 면이었다. 상황업무가끝나면40°C넘는폭염속주간에선풍기도 없는텐트막사에서서잠을자야하지만정상적인수면을 취할수없을뿐만아니라,계속되는고행으로야간근무를 1년 이상을 참아내야 했다, 정말 성실하게 근무에 임하였 다. 지금은 말로서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삶이었고 뼈를 깎는 고행으로 우리 인류 상전쟁은없어져야한다.우크라이나전쟁과이스라엘하 마스전쟁이남일같지않다고말한다. 월남전 파병 전투에 기여한 공로로 븮인헌무공훈장븯 을 수여받았다.인헌무공훈장은대한민국의5번째등급무공 훈장이다.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분투노력하여 부여된 임무 정도이상의능력을발휘그공적이뚜렷한유공자에게수 여하는무공훈장의5등급에속하는훈장이지만함께파병 되어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고 말 한다. 그리고 월남전 파병에 자원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 화를 수호하는 의지를 거양하고 희생과 헌신하는 전우애 등을보여주었다는생각에는자부심을갖는다고한다. 박수호현정은지금도고통속에서하루를보낸다.월남 파병 근무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하여 병원에서 수년간 다 발성골수종이라는진단을받아국가보훈청으부터전상군 경 7급 상이등급을 받아 지속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월남 전 참전 후휴증은 완치라는 말이 없다. 대한민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 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지 만목숨과바꾼유공자들에대한희생의대가는표현자체 가무의미하다는것이다. 그래도 조상님이 물려준 신체는 선조를 위하고 종원들 에게봉사할수있어다행이라고말하는박수호현종은함 양박씨구.소.명 종중에서 2012년부터 10년간 재무이사를 맡았으며현재는 감사업무를수행하고있다. 구소명종중은여느종중과다르다.부동산임대를통한 수익사업을하고있어웬만큼숫자에밝지않고서는할수 없는직위가재무관리이다.그러나10여년간재무를맡아 보면서 체계 있는 재무재표 등 모든 재무보고 자료는 마치 회계사무실에서꾸민듯철저하다못해빈틈이없다.이에 종원들의칭찬은하늘을찌른다. 그리고동료전우들을위한일에도소홀하지않는다.대 한민국무공수훈자회송파지회에서부회장을거쳐감사직 을맡아국민에대한반공의식과고취에작은힘이나마봉 직하고 있어 유공자로 수훈자로 국민에게 받은 사랑을 더 큰 부메랑으로 갚으면서 동료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며 전쟁의 상처를 감싸고 있어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길 기원하고기대해본다. 베트남전파병과박수호현종 박수호현종 채명신사령관으로부터인헌무공후장을수훈받고있는박수호현종 박수호현종이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송파지회표창을받고있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는 국가수 호유공자 단체로서의 소임을 다하 여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 평화적 통일 성업달성과 국가 발전에 기여 함과 동시에 지역사회 봉사 및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이다. 거 창지회는회원93명(무공수훈회원4 4명, 유족회원 22명, 유자녀회원 27) 이 가입되어 있다. 이분들은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공적을 세우고 영 예로운 무공훈장(화랑 8명, 인현1) 을 수훈한 분과 국가의 안전보장에 공헌하고 보국훈장(천수장 2명, 삼일장 7, 광복장 28명)을 수훈 받은분들이다. 그러나아이러니하게도이분들에대한예우는물론국민적관 심도 소홀한 상태에서도 거창군지회는 묵묵히 사회봉사와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유가족 등을 위로하고 함께하며 사회적으로 모 범을 보이고 있다.특히 박흥묵 회장은 6·25 참전 유공자를 친부 모섬기듯극진함을보이고있어회원은물론지역주민들의찬사 가이어져호국보훈의달을맞이하여소개해본다. 박흥묵회장은지난2022년6월13일취임했다.취임과함께거 창읍 재향군인회관 401호에 소재하는 사무실을 일대 혁신했다. 우선 문서 등 모든 업무 체계를 세우고 사무실을 리모델링하여 회원들의구심점역할하도록하고복지와권리를되찾는데노력 해 왔다. 특히같은공간에서활동한사람들간의소통과가족적인분위 기를만드는것이었다.6·25전쟁에참가한분들에게는친부모모 시듯극진한공경을함께한다. 이는전쟁유공자야말로우리나라를지탱하게한큰공로자이 고이분들의피와땀으로일구어낸국가이기에특별한예우를하 여야 한다고 강조한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박 회장의 성장과정 에서여실히드러난다.경남거창군가조면기리광성마을에서1 952년 2월 25일 태어났다. 광성마을은 밀성박씨 졸당공파 후예 집성촌으로 조부(휘 대제, 大濟)는 거창은 물론 인근의 함양 산 청 등에서도 유명한 한학자이다. 40여년 후학을 양성했다. 어려 운시기임에도집에서숙식을제공하며훌륭한한학자를많이배 출함으로서사후유림장에추서되는등지역유림의큰어른이었 다. 그리고 아버지(휘 동근, 東根)은 거창군 종친회를 출범시켜 초대회장으로나성재건립에중추적인역할을하는등박씨거창 군대동종친회가 지금에 있기 까지 모든 기반을 닦아 놓은 샘이 다.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 거창군 종친회장을 맡고 있 으며, 봉사단체 팔각회 회장을 맡고 있는 부인 정장숙 여사와의 사이에입양한딸등1남2녀를두고있다. 박 회장은 거창 농림고를 졸업하고 1970년 12월 육군삼사관학 교(제7기)에 입학 72년 12월 소위에 임관되었다. 육군 특수전사 령부(특전사)에서 군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국토방위에 앞 장서오다낙하훈련중부상으로1982년소령으로12년의군생활 을 마치고 고향에서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 거창에 정착, 이듬해인83년2월1일부터거창읍예비군지휘관으로임용된후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을 발휘해 부대를 최우수부대로 이끌었 다.이에2군사령부에서는‘자랑스런무열인’에선정되고,육군이 재정한육군참군인대상에선정되기도했다. 육군의 5대가치는 충성·용기·책임·존중·창의이다. 박 회장은 전역후거창읍예비군중대장과향토예비군거창지역대장을맡 아 예하 12개 읍면 예비군 업무를 총괄 지휘하며,국가에 충성하 고 지역사회에서는 책임 있는 자세로 임했고, 그의 선행은 많은 사람에게감동을준다. 이웃에사는조모씨(91년폐질환사망)의딸(당시9세)조양은 아버지를잃고어머니가가출하면서졸지에고아가되어막막한 처지에 박 회장은 그를 자신의 딸로 입양했다.부친으로 인해 폐 병이전염된것을알고정성어린치료끝에8개월만에완치시켰 고, 도벽과 나쁜 말버릇은 사랑과 관심으로 교화시켜 훌륭한 사 회인으로성장시켰다. 또 자신의 소속부대 병사 중 모친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것을 알았고, 설상가상 그의 어머니는 과로로 쓰러졌다. 당뇨병 과악성빈혈이원인이었다.읍대장으로근무한때였다.기증받은 헌혈증20매와자비로구입한백미40㎏2가마와된장한말,부인 이봉사하는단체팔각회에서치료비로기증한현금30만원을해 당병사에게전달하였다.또한적십자병원에사정을설명하고무 료진료를 받도록 협조해주었으며,거창군 박씨청년회 초대회장 으로 거창군종친회 관리사택에 무료로 거주하게 해주어 병세가 호전될수있었고,그병사는감사의마음을소중히간직한채성 실한사회인으로살아가고있다. 그리고 사망한 동료 자녀를 꾸준히 돌보아 와 ‘진정한 동료애 란바로이런것’이라는수식어를만들어냈다. 산청군 모 면 대장으로 근무한 동료가 1999년 4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어린 자녀 3명에게 돌아갈 부의금과 퇴직금, 보험금, 기타재산등약5억여원이동료의처와정부인남자에게돌아갈 것으로판단,자비300만원을들여변호사를선임해친권상실판 정을 받게 했으며, 그 돈을 3자녀의 큰아버지와 박 회장이 공동 관리인으로생명보험에장기신탁했다.그리고3자녀중장남김 모 군(당시18세)이 큰아버지 곁을 떠나 오토바이 절도 및 사고 후 도주 등으로 부산소년원 분류심사소에 수감되고 창원지방법 원에서소년원1년수감이선고되자박회장은탄원서를작성,재 판정에직접출석하여재판장에게호소하여직접관리한다는조 건으로 김군을 석방케 한 후 재적된 고등학교를 수차례 방문,교 적을 부활시킨 다음 거창산업과학고의 담임교사와 교장을 설득 하여김군을2학년에편입시켜학업을이어가도록하면서김군 이 거처하는 숙소 옆에 방을 얻어 김 군을 관리하는 동료애를 발 휘, 메마른 사회에 진정한 봉사와 희생정신을 아름다운 귀감을 남겼다. 박 회장의 이 같은 봉사와 희생정신은 1986년 4월 국가안전보 장기여 공로로 대통령표창, 2000년 12월 2군사령관상인 자랑스 런 무열인상(2군 예하 전체),2000년 12월 거창신문사 재정 사회 봉사대상, 2001년 9월 거창군민대상(거창군), 2002년 12월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육군참군인대상(육군2명), 2004년 11월 (사) 대한민국팔각회경남팔각상(국가안보부문),2011년1월보국훈 장 광복장(국가유공자)수훈 사단장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에 이 어훈장까지수훈하는등최고의이력을갖추고있다. 박 회장은 거창양민학살 유가족 등 아픔을 갖는 지역민들을 찾아 위 로한다. 그리고 민방위 소양교육과 일반인 안보교육 등 거창전문대 강 사로활동한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거창지회 는 매년 거창양민학살 사건 위령제 를찾는다.거창양민학살사건은6·2 5 전쟁의 또 하나의 큰 슬픔과 아픔 으로기억되는사건이다.1950년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국방부는 후방 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 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 을 창설했고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제9연대와제13연대·제20연대를예하부대로두었다.제11 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1951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일부 와 전라남도 ·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거창사건은 토벌작전의 제4기에 해당하는 1951년 2월 1 일부터3월31일사이에발생한것이다. 1951년2월5일작전에들어가신원면일대로진격한군인들은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대대는덕산리내동에서밤을보내고아침일찍과정리면소재지 로 이동해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날이저물자주민100여명을탄량골하천계곡에서학살했다. 군인들은2월11일와룡리·대현리·중유리일대마을주민1,000 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 찰 · 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총살했다.당시총살당한주민은15세이하남녀어린이가359 명,16~60세가300명,60세이상노인60명(성별:남자327명,여자 392명)으로총719명이었으니6·25가낳은또하나의비극이다. 6.25참전유공자는이제한분두분유명을달리한다.현재7명 이생존해있어박회장은이들을친부모처럼극진하게모신다. 그리고이들의손자손녀들에게장학금을전달하며힘과용기 를 준다. 무공수훈자 거창군지회는 회의 운영을 위한 재원으로 지자체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으나 배정된 금액으로는 역부족이 다. 이에 지회장 사비로 부족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열악한 실정 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 단체의 예우는 개선되어야 할 부분으로이번취재중새삼느낀다. 박흥묵 회장은 취임이후 줄곧 유공자 의권리증진에앞장서고있다.즉유공자 가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 고 있는 것이다.박 회장은 수훈자회 제33 차 정기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한다. 뷺우리 곁에는 6·25 전쟁과 월남전에서 생사를촌각으로달리하는긴박한전장에 서 추위와 배고픔,또 옆 전우가 산화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 고죽음의공포를극복하시고당당하고용기있는행동으로전투 에임하시어그큰전과를국가로부터인정받아무공훈장을수여 받으신우리들의부모님세대,원로대선배님들께서는각가정과 나라의정통성을이어오신선배님의희생의대가로지금세대가 누리는풍요와화평의바탕이되었음을생각할때가슴이아려옵 니다.선배님 재삼 노고가 크셨고 감사합니다.또한 이 자리에는 전후방각지에서국방을위하고나라의정통성을장구한세월동 안지키기위해각고의노력을다해온그충성심으로영예로운보 국훈장을수여받은여러동료선후배님그동안우리가나라를위 해 바쳤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이제는 무공수훈자 거창지회란 이름아래다시단합하여지역발전과국가안보에기여하며이회 의모태가되신우리곁에계시는9분의참전원로선배님을지극 히예의를다해서공경으로모시고선배님들에게물려받은고귀 한우리의전통을만들고후배님들과함께이어갑시다.뷻 원로를예우하고동료와선후배간의끈끈한정으로호국의정 신을이어가려는박회장의운영철학을엿볼수있어6월호국보 훈의 달을 맞아 호국보훈의 정신을 되새기고, 국민들과 함께 그 가치를나눌수있는기회를마련하도록기대해봅니다. 대한무공수훈자회거창지회박흥묵회 장 박흥묵회장 회원을가족처럼전쟁유공자를아버지처럼 박흥묵회장이대한무공수훈자회회원및가족과함께하고있다. 육군참군인으로대한민국국방에기여 육군5대가치꾸준히실천하는참군인 지역곳곳찾아함께나누는봉사로 매년 거창양민희생자를 추모 하는 조화를 보내고 위로한 다. 무공수훈자가올바로인정받는사회를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