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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30일 화요일 6 (제208호) 관향조 종친회 충주박씨 참의공파 종중에서 매년 지급 하는 제26회 장학금지급 행사가 3월 23일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 422번지 충주박 씨재실영모재에서성대하게행사를진행 하였다. 충주박씨 참의공파 종중 장학회(회장 박경석)에서는 매년 참의공 후손들 중 대 학에재학중인학생에한하여성적이우수 한학생들을장학생지급대상자로선정하 여매년30여명전후하여장학금을지급하 여오고있는데금년도에는26명의장학생 을선발하여지급하였다. 이날 행사 이전에 장학생으로 선정 된 학생 26명과 학부모 그리고 종중임원들은 고려 부정을 지낸 관조(휘 영)외 7위(位) 의위패가모셔져있는추원사에서선조님 들에게인사를올리는예를갖추고참의공 (휘 진) 선조님의 산소에서 참배를 하는 예를 올린 후 장학금 지급 행사를 진행 하 였으며 26명의 학생들에게 장학증서와 장 학금을전달했다. 장학회 박경석 회장은 인사말씀을 통하 여장학생여러분들께서는더욱학업에정 진 하여 국가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되 어 주실 것과 우리 충주박씨의 가문을 더 욱 빛내어 달라고 인사말씀을 하고 기념 촬영을 한 후 참석자 모두가 영모재에서 점심식사를마치고행사를종료하였다. 충주박씨 참의공파는 관조 휘 영(英)의 9세(世)로개성소윤을역임하고사복시정 에 증직된 휘 광리(光理)와 합천이씨(陜 川李氏)의 아들로 1366년(공민왕 丙午)에 태어난휘진( 풂 )으로부터문호가열린다. 그는 진사(進士)가 되어 나라가 어지러 워짐을 알고 공명의 뜻을 버리고 동생 소 (蘇, 판서공)와 함께 호서 덕진현 유성리 에 은거(隱居)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 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조선조에 이 르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이어 진해· 직산감무가되어많은치적을남기고1422 년(세종 4,壬寅)년에 하세하니 향년 57세 로손자형무(衡武)의귀(貴)로인하여병 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어 후손들은 참의공파(參議公派)라 하여 세계를 이루 고, 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으니 효함(孝誠) 충함(忠 誠) 제함(悌誠) 신함(信誠)으로 문중은 크게번성하였다. 장남 효함의 호는 청간재(廳澗齋)로 성 품이 청렴 강직하여 처음 근위병(近衛兵) 으로 명성을 날렸고, 해풍 고을을 관장함 에 정사를 모두 으뜸으로 펼치고,녹봉(祿 俸) 외에는 취하지 않으니 청백함이 명성 을 떨쳤다. 특히 세종 경술년(1430) 가을 보령에 해구(海寇)가 침입하여 걱정거리 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으로 선 발되어 부임즉시 순찰사 최윤덕, 감사 박 안신과 함께 성 동쪽 일리(一里) 지점 당 산(唐山)남쪽을살펴면밀한계획으로몇 달 되지 않아 축성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도적이 자취를 감췄다. 얼 마 되지 않아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 마후나아가서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 護府使)가 되었으며, 참의공파 후예중 가 장번성했다. 한편 장학금 전달식이 진행된 영모재는 충주박씨의 대표 재사(齋舍)이다. 참의공 께서 낙향한 이후 600여 년 세거지를 수호 하는유지라할것이다. 영모재는 외곽(外郭) 담장을 구획(區 劃)하여 두 개의 공간(空間)으로 나누어 사용(使用)한다. 앞쪽에 영모재(永慕齋), 뒤쪽 높은 곳 에는 사당(祠堂)인 추원사 (追遠祠)를 각각 배치하였다. 외삼문(外 三門)의 중앙 솟을 대문(大門) 가운데에 는 돈후문(敦厚門)과 도동서당(道洞書 堂) 충주박씨대종중(忠州朴氏大宗中)이 란 현판(懸板)이 있고, 永慕齋 안에는 忠 孝를 傳해가고 돈목(敦睦)을 지켜가자는 뜻의가전충효세수돈목(家傳忠孝世守敦 睦)의 가훈(家訓)이 있어 이날 장학생 또 한선조의삶을엿볼수있었음이다. 2024년도충주박씨참의공파종중장학금 지급 충주박씨참의공파종중장학금전달식이지난달23일개최된가운데장학생들이파조참의공묘역을참배후기념촬영을하고있다. 누적700여성손수혜 박우숙공사원이장학생들에게참의공묘역을안내하고자세한설명을함으로써자부심과긍지를심어주고 있다. 우리나라3대악성의한분인난계박연선생의학덕을추 모하기위한제향이지난21일(음3.13,일요일)오전보성향 교 안규옥 원임전교의 집례로 안남순 보성향교 전교,조순 옥 곡성향교 원임전교,김종서 입면장 순으로 헌작하고 박 충일 유도회 보성지회장(진원인)의 독축으로 엄숙봉행되 었다. 이날 제향은 지역유림 5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제물 봉 진례,제례,분포례,강평순으로진행되었으며,초헌관으로 헌작한안남순전교는난계선생의뛰어난학문과악성(樂 聖), 자제분의 절의 정신 그리고 후예들의 충의 정신이 배 어있는 유서 깊은 오봉사의 초헌관으로 헌작하게 되어 무 한한영광으로그음덕을한몸에받게되었다고말하고유 학발전에도함께노력하자고말했다. 난계 박연(蘭溪 朴堧)선생은 고구려 왕산악,신라의 우 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악성(樂聖)으로 추앙받고 있다.선 생은 1378년에 태어나 1398년 20세 되던 해 부모를 여의고 엄격한 예법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시묘에 토끼가 따르고 호랑이가 호위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1402년 이 사 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의 왕명이 내려지고 1405년 생원 이되고태종11년(1411)에문과에수석으로합격하자왕은 불러들여 크게 포상하였고, 왕당(王堂, 홍문관 별칭)선발 되어간원헌부춘방(시강원의별칭)에오르고경연에오랫 동안 있으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임금께 아뢰니 임금 또한 야심(耶心)없이좋아하였다. 집현전교리를거쳐세종즉위년(1418)에관습도감제조 가되어음악에전념하며,동7년(1425)에악학별좌가되어 당시의 불완전한 악기의 율조를 정리하여 악서를 편찬하 였다.그후편경을만들고,궁정에서향악을폐하고아악을 연주케 하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동15 년(1433)에는 회례아악을 만든 공으로 안마(鞍馬)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그 후 이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문종때에는 중추원사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또 예문관 대제학 에올랐다. 특히 피리에 능했으며,조선 초기에 국악의 기반을 닦아 놓은 훌륭한 업적을 남기었으나 세조가 즉위받자 선생은 관직에서물러나고향으로돌아왔다.시호는문헌(文獻)이 다. 오봉사가 있는 궁동(弓洞)마을 입향조(入鄕祖)는 박경 흥(朴卿興)이다. 박경흥의 호(號)는 퇴락재(退樂齋 ) 또는 월오헌(月梧軒)으로 난계선생의 증손자요 풍기군수 박곤 (朴坤)의 아들이다. 입향조 퇴락재공(휘 卿興)이 멀고 먼 옥과현(玉果懸)을 찾아 내려 온 까닭은 1450년대 중반에 휘몰아쳤던 단종사화(端宗士禍 1453~1456)로 불어 닥친 멸문지화(滅門之禍)을피하기위해서였다. 오봉사는 근세의 한학자요 교육자로서 학명을 떨친 우 계박준호(又溪朴埈浩1890~1959)와박래춘(朴來春)등이 선대인 난계 박연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 건립을 추진하고, 이어 박래영(박준호의 子), 박준하(朴準夏) 등 후손들이 서울국립국악원에서난계부부의영정을모셔와1967년오 봉사(梧峰祠)를준공했다.매년음력3월13일지역유림들 의주도로제향을모시고있다. 난계박연선생추모제향봉행 전남곡성오봉사 지역유림주관 박충일축관이독축을하고있다. 제례전제물봉진례를하고있다. 죽산박씨 임곡종가는 임진왜란에 혁혁 한 공을 세운 죽림처사공(휘 경)으로부터 문호가 열린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충 과 효를 근본으로 하여 병자호란 등 나라 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났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강상의 근본을 닦아오면서 종가 의 면모를 이어왔고, 시집온 고(故) 이향 림 여사는 현 형엽 회장과 혼인하여 종사 에 빠져있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행상으로 받쳐와지금의종중을만들었다. 이에 지난 6일 향사 전 종원들이 마련한 기념식수기념비제막식을가졌다. 이번 기념식수는 시집온 며느리들에게 동기부여는 물론 사기진작에도 크게 영향 을 받을 것이다. 한편 이날 향사는 죽산박 씨대종회정은회장을비롯한임원진이대 거 참석한 가운데 형엽 회장의 집례로 홍 종 종손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이어 금 열,승열현종이 아헌과종헌을승곤,흥렬 현종은각각좌우집사로제례를도왔다. 이날제향은초헌관으로헌작한홍종종 손으로부터 15대조 죽림처사공을 비롯한 아버지까지봉행되었다. 죽림처사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울분을참지못하여함재(涵齋)기효 증(奇孝曾)과같이각고을에서의곡을모 아 장성 의병청으로 가서 전략을 세워 의 견을진술하니여러의사들이공을기효증 의 종사관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의곡 수 천석을 죽음을 무릎 쓰고 바다를 통하 여의주행재소까지운반하여군량을공급 하였다. 그리고 동생 단구자공(丹邱子 휘 종)은 광해혼조에 과거의 뜻을 버리면서 후학양성에 매진하다 임진왜란을 맞아 백 형 죽림처사공을 힘껏 도왔고, 정묘·병자 호란에스승인사계김장생선생의건의로 의병을일으켜진격하던중청주에이르러 화 의가 이루어졌 다는 소식에 통곡 하며 고향으로 돌 아와 문을 닫고 세 상과 단절하여 사 계선생은 가로되 남산유일노회수공 후지구(南山有逸 老回首公候之句), 남산에 늙은 훌륭 한 선비가 있으니 머리를 쳐다보며(좌우를 돌아보며) 공후 (공직자들)를 보고 웃었다.(화의에 동조 하는사람들을보고웃었다.)라는시를남 겼다. 죽림처사공의 손자 포허공(휘 진민)은 종조단구자공과함께사계선생문하에서 공부하였고,병자호란에 함께 창의하였으 나 화의 소식에 울분을 토하며 돌아와 은 거하며 두문불출 하면서 숭정처사로 평생 을 살아오다 1658년 1월 17일 하세하였다. 포허공이하후손들은선조의아름다운덕 행(德行)을근본으로삼아그명성을이은 가운데10대손휘정원(正源)은아버지휘 진태(鎭泰)에 이어 타고난 효자로 임곡지 역에서는최고의효자로명성을이었다. 죽산박씨임곡종중시향봉행및기념식 수 고(故)이향림여사행상으로종사에여념없는남편뒷바라지하고함께선영받 들어 죽산박씨임곡종손가시향이지난6일봉행된가운데참례한종원이기념촬영을하고있다.임곡문중은매행사에젊은며느리들이대거참석 활기를띠고있어화재 다. 임곡 문중으로 시집와 평생을 종중을 위해 헌신한 故 이향림 여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식수비 제막이 제향전진행되었다. 븮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아우 복호 는고구려에미사흔은일본에억류되어있 어 슬픔으로 지내던 중 신하를 보내어 귀 환을여러차례요구했으나번번이거절당 했다.이에 관설당공이 고구려로 가서 뷺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뷻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 다. 그리고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뷺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나를 해치 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뷻하고 망명한 것으 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 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속셈을품게되었다.왜왕으로부 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데리고바다에나가뱃놀이를하 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 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 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미사흔을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공(公)은 감시하는 왜인에 게 뷺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 오뷻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뷺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뷻는 왜왕에게 뷺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 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 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뷻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 닥을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뷺나는 계 림의 신하다뷻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 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 다.븯 관설당박제상선생의충절의기록이다. 이처럼 신라 만고충신으로 후세에까지 영 원히 전하는 관설당공의 추모제향이 전국 곳곳에서열렸다. 4월6일울산의치산서원에서는지역유 림 주관으로 박제상공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에 대한 얼을 추모하고, 충·의·효·열의 숭고한 정신을 배우기 위한 제례에 지역 유림과관광객들이함께했다. 4월 11일 진도읍 교동리 북상마을에 소 재한 유방사에서는 경주박씨 후예들이 선 조의위업을기린가운데함안문중의박기 학회장이초헌관으로헌작하고이어강진 문중의박성열,진도문중의박주홍현종이 각각헌작했다. 유방사는 1938년 경주박씨 춘파공파 문 중에서 건립했다. 당시만 해도 진도는 외 딴 섬 지역으로 육지와 달리 교통과 문물 의 반입 등이 자유롭지 못한 곳으로 후손 들은항시선조관설당공의충절을정신적 가훈으로 삼아왔다. 유방 사(遺芳祠)는 일 본의유방원(遺芳院)에서그뜻을취했다. 4월 13일 강릉 경양사에서는 지역유림 으로 봉행되었으며(관련기사 1면), 4월 23 일에는 공주 숙모전의 동계사에서 전국에 서 찾은 유림과 후손 등이 참례한 가운데 양동문중의박우형,안동문중의박순철현 종이아헌관종헌관으로헌작했다. 동계사는숙모전·삼은각동편에있으며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왕의아우마사흔을구출하고왜지 에서순절한관설당박제상의항일충혼을 모신 곳으로 936년(고려태조19)에 개국공 신유차달이공의만고충절을이곳에초혼 제사하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하였다. 화재로 재건되고 또한 철향(撤享)되었다 가1956년사림의헌성으로중건되고아사 유차달을추배하여지금에이르고있다. /자료제공박흥열(영해박씨대종회) 신라만고충신관설당박제상선생추모제 향봉행 지난4월23일공주숙모전동계사에배향된관설당공의제향에후손들이참례하여기념촬영을하고있다. 동계사제향의아언관우형 ,종헌관순철현종 울산치산서원·공주동계사·진도유방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