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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31일 일요일 6 (제204호) 관향조 종친회 1496년 경기도 남 양에서태어나부인 청주한씨와장남기 (杞) 차남 매(梅) 형제를데리고전남 순천에정착한이래 지역의문풍을일으 킨운곡공(휘증손) 과 두 아드님 손자 등 3代 5位의 제향 을판서공파대종회(회장광기)주관으로1 1월 27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시 상사면 쌍 지리 선영에서 철수(喆洙) 운곡공 종친회 장의 집례로 홍일(洪日) 현종이 초헌관으 로헌작하고병구축관의독축에이어도원 재공후손인기영(其榮)현종의아헌례,옥 석(玉錫)현종의 종헌례와 유식례,음복례 등30여분에걸쳐봉행되었다. 운곡공은 성균생원 휘 윤문(允文)의 아 들이다.1496년태어나족대부도원재 선생 에게 수학하였는데 정암 조광조 선생도 군 자인물이라며극찬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후 부인 청주한씨와 아 들기(奇),매(梅)형제와가족그리고사위 양천인 허형을 대동하고 남하하여 전남 순 천황전을거쳐상사면쌍지에정착했다. 운곡공은 슬하에 기(杞), 매(梅) 형제를 두었는데이들형제가광양과순천의큰집 성촌을 이루어 지금의 판서공파 양대 산맥 인 셈이다. 장남 기(杞)는 통선랑(通善郞) 이고, 차남 매(梅)는 중종조에 병절교위 부사맹이다. 장남 기(杞)의 아들 대조는 승사랑이고 뱚승사랑공(휘 대조)의 아들 민행·민복· 민규삼형제와민보의아들인,손자신방· 신국 등 3대 6위의 제향은 순천 제향 이틀 후인 29일 광양시 봉강문 비봉산 자락 묘 원에서 운곡공 종중(회장 철수) 주관으로 봉행되었다. 이날 제관은 철수 회장이 집 례 맡아 진행하고 초헌관 경수, 아헌관 순 모,종헌관 길서,축관은 병구 현종이 각각 맡았다. 철수 회장은 제향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쌀쌀한 날씨에도 원근을 마다하지 않고 참 례해준 일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 고질서정연하게제례에임하여줄것을당 부했다. 운곡공종중은공의장자휘기(杞)의후 손으로 장파(長派)이다. 통선랑공(휘 기) 는부인창녕성씨와의사이에승사랑(承仕 郞) 휘 대조(大틘 )를 낳았으며, 승사랑 휘 대조는단인제주양씨와의사이에민행·민 복·민구 등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민행 (民行)은 훈(訓)·회(誨) 형제인데 장남 훈 (訓)은 아들 성량이 무후(无后)이고, 차남 회(誨)는 어모장군 훈령원정으로 여수 율 촌문중으로세계를이룬다. 승사랑공의차남민복(民復)은아들4형 제(인·당·양·진)를 두었는데 장남 인(認) 은 무과에 올라 선전관으로 아들 신방(信 邦)·신국(信國) 형제 중 장남 신방(信邦) 은 병절교위이다. 그의 아들 시석(時錫)은 여수율촌행정문중,차남신국(信國)은종 사랑으로 광양 봉강 봉촌문중으로 나뉘고, 승사랑공(휘 민복)의 차남 휘 당은 계공랑 (啓功郞)으로광양골약중동문중,삼남휘 양은순천해룡계당문중,사남휘진은광 양도청문중이다. 상주(상산)박씨판서공파제향봉행 음10·15운곡공(휘증손)이하3대(代),절재공(휘민홍)의아들,손자(3代)음10·17광양봉 천묘원등 순천입향조운곡공을비롯한이하선조제향이지난달27일순천시상사면쌍지리선영에서엄숙봉행되었다. 뱛 뱚운곡공(휘증손)아드님통선랑(휘기)부사맹(휘매) 뱛뱚손자승사랑(휘대조)남포공(휘대붕)븣판서공파대종회주관 홍일 초헌관이 헌작하고 있다. 그의 아들 민행(敏行)은 광양시 봉강면 평전문중묘역에서29일제향한다, 병절교위부사맹(휘매)의아들대붕(大 鵬)은사마시에급제하여주부로내금위승 위부위에 봉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변 란인 기축옥사(己丑獄死) 때에 상소를 올 렸다가 투옥된 후풀려나낙향하였다.당시 상소는 간신을 소탕해야 한다는 것인데 오 히려간신들에의해투옥된것이라하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창의하 여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 투에서 많은 왜적을 물리치고 장열하게 전 몰하였으니 상사면 동백 와룡산 아래에 초 혼 장사했다.남포공의 활약상은 금산사재 절의록, 호남절의록에 전해지고 원종공신 에녹훈되었다. 뱚뱚뱚뱚뱚뱚남포공의아들손자증손등3代5位 뱚뱚뱚뱚뱚뱚뱛운곡정사에서시향봉행,남포공종중주관 뱚뱚뱚뱚뱚승사랑공(휘대조)의아들,손자,증손등 뱚 3代6位광양비봉산묘원봉행,운곡공종중주관 조선중기 정치사상의 지표가 된 의리사상 의 천명자이자, 청백리이고, 역사저술가이자 한문학의대가로역사상큰족적을남긴‘눌재 박상’선생의추모시향이지난28일오전10시 30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마을 선영에서 후 손50여명과방계후손인대전의참의공후손 다수가참여한가운데있었다. 이날 영하의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선조를 향한강한숭조심에가득한후손들이아침일 찍묘소로올라가는계단을청소하고종석회 장은팔을걷어부치고진설을함께하는등쌀 쌀한날씨를무색케할만큼훈훈한가운데종 표현종의집례에따라종석종친회장이초헌 관으로헌작후영성감사의독축에이어창규 찬성공파회장,희영판서공이사순으로헌작 으로엄숙봉행되었다. 이어문간공의장자휘민제(敏濟),장손인 수(仁壽), 그리고 실전된 인수 공의 아들 諱 진(璡) 이하 9세 11위의 단소에서 사손 승천 (承泉) 현종의 초헌에 이어 종석 회장, 종표 서울종회 부회장 순으로 헌작하고 영성 감사 의독축으로이어졌다. 눌재박상선생은강직한성품으로인해왕 을 비롯, 종친, 훈척들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서 관직생활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곧 연산 임금 때 총애를 받는 궁 인의 부친으로서 향리인 나주에서 권세와 탐 학을 자행하던 우부리(牛夫里)를 처단해 버 린일,중종초기언관인사간원의헌납(獻納) 직에 있을 때 공신호를 남수(濫收,거두어 들 임)하는 것, 외척들을 중용(重用)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던 일, 중종 10년(1515)에는 담 양부사로 재직하던 중 반정으로 말미암아 폐 위조처를당한중종의첫왕비단경왕후신씨 (端敬王后 愼氏)를 복위시키고 왕비의 폐위 를 주도한 박원종 등 반정의 3훈신(勳臣)을 임금을 협박한 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올린일등으로여러차례옥에갇혔다 가풀려나기도하고,먼곳으로유배당하기도 하였으며, 상주·충주 목사(牧使) 등 주로 외 직으로전전하였던것이다. 그렇지만이같은불의에대한과감한지적 과 비판은 이 시기 정신적 지표가 되어 이후 의리사상을 선도한 인물로서 높은 평가를 받 게 되었다. 눌재는 또 역사적으로 븮동국사략 (東國史略)븯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고 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특히 절의 의사적을널리들어내고자하는의도로편찬 한것으로이해되고있다. 그런가하면눌재는외직으로담양부사,충 주목사로재임하던때에두차례에걸쳐청백 리로뽑히기도하였고,일찍별세한형님박정 (朴禎)을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며 아우인 육 봉(六峯) 박우(朴祐)가 진사시에 합격하자 형님과함께기쁨을나눌수없음을슬퍼하면 서 재산을 나누어주어 형제간에 지극한 우애 심을드러내보이기도하였다. 충주박씨문간공파종중시향봉행 쌀쌀한날씨속에청빈한삶과절의정신기려 왼쪽부터희영종헌관,종석초헌관,창규아헌관 밀성박씨고양선조원당종중회는 지난 12월 9일 경남 밀양시 소재 밀 성재에서 열린 전국 밀성인 성손화 합 한마당 전진대회에 박봉준 회장 을비롯한임원진이참석한해동안 밀성박씨종중을 위해 열심히 활동 한각분야별수상자의모범적인사 례를깊이듣고종중에접목하는한 편 5대째 전해오는 가문의 우수한 ‘배다리막걸리’를선보였다. 밀성재 청년회에서 주관한 이날 행사는 모범적인 성손을 발굴해 시 상하고 종중 활동에 참여를 고취시 키는계기를만들었으며이같은모 범사례는 모두가 함께해야 함을 느 꼈다.한편 참석한임원진은밀양시 장의축사등기념식후애종상을수 상한 규정공파 박성훈 회장과 기념 촬영을한후중식을함께하고긴여 정의귀가길을재촉하여무사히고 양종중회에도착했다. /박봉준명예기자(경기도고양시지부) 밀성박씨충헌공파경기도고양시원당종중회 전국밀성인성손화합한마당전진대회 규정공파박성훈회장(가운데)을비롯한충헌공대종회임원진이이기념촬영을하였다. 상주(상산)박씨 판서공파 제향 봉행, 음 10·15 운곡공(휘 증손) 이하 3대(代), 절재 공(휘 민홍)의 아들,손자(3代)음10·17.광 양봉천묘원등 전남 순천과 광양, 여수에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상주박씨 판서공파 종중의 시 향이지난달27일과29일봉행되었다.상주 박씨의 순천 입향은 운곡공 박증손 선생으 로부터문호가열렸다.그리고매년향사에 경기화성시상암공후도원재선생후손들 이 대거 참례하면서 일가의 정을 나눈다. 양(兩)종중은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 다. 운곡공은 족대부인 도원재(휘 세희)공 문하에서 경전을 강토(講討)하며 심신과 언행이 바르고 총명하여 스승의 신망과 총 애를 받았다.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로도 원재공께서강계로유배를가면서세도(世 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의 병 이날로깊으니영진하지말것을당부하여 십 여 년간 몸을 감추고 도학에 전념하던 차 1530년 도원재공의 부음을 듣고 단신으 로 강계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남양으로 운구안장하였다.사화에 연루된죄인의시 신을 수습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운곡공으 로인해도원재공의유해가보존된것이다. 이에 후손들은 순천으로 내려간 운곡공을 찾아 예를다했고,사후에도 수백 년간향 사에 참례하고 순천의 운곡공 후예는 경기 화성 향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교류하고 소 통하며정을나누고있는것이다. 이번향사는27일순천쌍지리운곡공묘 역과 운곡정사, 29일 광양 봉강면 비봉산 자락묘원에서각각봉행되어소개해본다. 임란공신 남포공 (휘 대붕)의 아들 민홍(敏弘), 손자 근(謹)·간(諫), 증 손 희훈(希勛)·희 열(希說) 등 3대 5 위의제향은운곡공 제향직후남포공종 중주관으로운곡정 사에서 11시 30분 정용(正傭) 집례의 집전(執典)으로 진행되었다. 제관은 초헌 관 병권(炳權),아헌관 홍일(洪一),종헌관 현모(玄模), 축관 병호(炳虎) 현종이 각각 맡아 정성을 다했다. 남포공의 아들 휘 민 홍은 1542년 태어나 음직으로 절제사이고 장자근(謹)은학생이고,근의아들희훈의 부인 목천장씨는 기묘명현 목원군 장응두 의손녀이다.절제사공의차남간(諫)은선 교랑행북부주부이고그의아들희열은영 조때통훈대부장예원판결사이다. 이날 제향을 모신 운곡정사는 1827년 반 남인 박종학 공이 승평원님으로 부임하여 운곡공과 남포공의 사당건립을 예조에 주 창하였고, 이후 사림의 공의로 이천사(伊 川祠)를건립하고강재송치규(1759~1838) 선생이 강당에다 운곡정사(雲谷精舍)란 당호를써 걸었다.그러나고종 무진년(186 8년)각지서원훼철령에의해훼철되어향 단(香壇)이철폐되고당역시폐해졌다. 1935년 을해년에 종론이 일치되어 힘껏 재 정을모아엣그대로자경동유택아래에다 재건하였다.비용을계산해보니6,300냥가 운데 1,170냥이 부족해 어쩔 수가 없었다. 그후에금전출납을맡아정리한쌍지리후 손중형(重衡,현모종헌관의증조부)이전 후극력주선한것은천성이효성스러워집 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데도 땅을 팔아 장부 의빛을모두청산하였으니그성의로힘을 펴게되었을뿐만아니라문중에서백세후 까지모범을삼게되어경내에공적비를세 워기리고있다. 현모쌍천문중회장이종 헌관으로헌작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