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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조명하 선생 59 로 일제에 탄압 받는 민족의 쓰라림에 눈을 떴다. 그는 1926년 3월 신천군청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 구 · 노백린 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무용담을 전해 듣고 애국남아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그 무렵 아들 혁래(赫來)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던 부인 오금전(吳金全)을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갑자기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 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 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채 돌아섰다. 처자식을 만나 마 음이 흔들릴 지도 모르는 자기자신을 채찍질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중구(呂仲九) 등 친구 6명이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웅지를 품고 고 향을 떠났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 본 땅에 상륙했다. 1926년 9월 신천군청 서기직을 사직하고, 10월 17일 고향을 떠나 22일 일본 오사카[大 阪]에 도착하였다. 건전지공장과 메리야스공 장 잡역부로 일하며, 야간에 상공학교(商工 學校)·상공전수학교(商工專修學校)에서 수학 하였다. 일본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명하풍 웅(明河豊雄)이라는 일본인 행세를 하였으나, 식민지인으로서의 민족적 차별을 직시하게 되었다. 타이중시에서 일본 육군대신 구니노미야 처단 시도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상 하이[上海]로 가기 위한 기착지로 타이완[臺 灣]행을 결심하였다. 1927년 11월 7일 타이 완 지룽항[基隆港]에 도착한 후 타이베이[臺 北]를 거쳐 타이중[臺中]에 정착하였다. 부귀 원(富貴園)이란 찻집에 근무하면서 차 배달을 하였고, 차 농장에서 일하면서 타이완인 장 톈디[張天弟]에게 검도를 배웠다. 이후 일본 일본 유학시절의 조명하(왼 쪽, 독립기념관 제공) 조명하 의사가 구니노미야 척살을 시도했던 타이 중시 현장 앞의 건물(독립기념관 제공) 조명하 의거를 보도한 신문 기사「대만서 발생한 중대사 건 구이궁(久邇宮) 전하를 위해코자」(국사편찬위원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