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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도연 선생 59 그래서 서울 서대문 밖 차석희, 김덕문 등 우 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 2학년에 입학하 였다. 태극학교에 들어가 비로소 근대학문에 접하게 되면서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번민을 하게 되었고, 이원재 · 최연 택 등의 친우들과 의형제를 맺고 국권을 되 찾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기도 했다. 그런 가 운데 ‘대한자강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도 자주 참석하고 그밖에 각종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7세 때인 1910년, 마침내 대한제국이 일 제에 강제병합을 당하고 말았다. 태극학교를 졸업한 김도연은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우 수한 교사들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다. 특히 한글 학자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 를 받게 되었고 이 같은 인연으로 훗날 ‘조선 어학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계기가 되었 다. 보성중학교 재학 중 면학에 열중하는 한 편, 민족과 국가를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일 본 유학을 준비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 기로 결심한 이유는 일본과 일본인을 더 많 이 알아 우리나라 침략에 대한 불법성을 쉽 사리 알아차려 대일투쟁을 하기가 쉬울 것이 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과 2 · 8독립선언 그는 1913년 초가을 일본으로 유학을 떠 났다. 중학교 재학시절 그는 한국 유학생들 간의 단합을 목적으로 하는 ‘반도중학회’라 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긴조중학교 졸업 이후 경제학으로 유명한 게이오대학 이 재과(理財科)에 들어갔다. 그가 유학할 당시 일본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약 7, 8백명 있었 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직되어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 다. 재일유학생의 중추기관으로 기능했던 조 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를 맡으면서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조선유학생학우 회’ 외에도 ‘기독교청년회’의 회장직을 수행 하기도 했다. 김도연의 태극학교 포증서 2 · 8독립선언 대표자 출옥 기념사진. 뒷줄 적색 동그라미 표시가 김도연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