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이달의 순국선열 • 이의준 선생 59 있을 뿐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가 쓴 이 명으로는 이병준 (李秉俊)과 한권웅(韓權雄) 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그는 1923년 음력 정월(양력으로는 2~3월 경) 뜻한 바 있어 동지 김창균(金昌均)과 함 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만주)으로 망명 하였다. 그 뒤 중국 봉천성(奉天省, 현재 요녕 성) 집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輸林子)에 자 리를 잡고 조국독립을 위한 일대 투쟁에 떨 쳐 나섰다. 특히 그는 남만주의 서간도 일대 에 근거를 두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독 립운동 조직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 제1중대에 투신하여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분투하기 시작했다. 이 때 그는 제1중대 장 백광운(白狂雲, 본명 채찬(蔡燦)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서간도 일대와 평안도 등지의 국내지방을 왕래하며 재만한인(在滿韓人) 교 민들의 보호와 각종 군자금 모집, 기타 독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최초의 무장 투쟁은 1923년 6월 6일로 파악된다. 즉 그는 통의부 소속 독립군 김정욱(金貞旭) 등 4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서 국 내로 진입한 뒤, 국내 정찰과 독립군 자금 모 집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또 같은 해 6월 12 일에는 평안북도 위원군 봉회면 노동령(蘆洞 嶺) 고개 부근에서 동지 송선호(宋善鎬) 등 세 사람과 함께 매복하고 있다가, 강계군 고산 령 우체국에서 위원 우체국으로 가던 우편물 을 공격하여 현금 1,500여 원과 많은 우편물 등을 빼앗는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노획한 현금 1,500원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많은 액 수의 자금이었기 때문에,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활동자금 및 군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같은 해 7월 초순에 는 전용규(田龍奎) 등 부하 세 명을 거느리고 위원군 마덕면에 있는 장기섭(張基涉)의 집 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자금 50원을 거두었 다. 그리고 8월 20 일에도 역시 부하 이화주 (李化周) 등 7명을 거느리고, 강계군 풍청동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1924.3.10, 국가보훈부 제공)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참의부 의용군 독립군 부대(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