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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장태수 선생 59 고 정치 ·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 을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따라서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양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은 청일전쟁의 승 전국인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했다. 하 지만 승전의 도취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일 본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 프랑 스 · 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나라로 부터 할양 받은 요동(遼東)반도를 반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취약성을 간파한 민씨세력 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쫓 아내려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 여 갔다. 이에 일본 정부는 지속적인 자국 세 력의 확장을 위해 1895년 8월 20일 반일의 핵심 인물인 명성황후 민씨를 참살해하는 만 행을 저질렀다. 뒤따라 일본 당국이 친일 김 홍집내각을 사주하여 그해 11월 소위 ‘을미 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 을 단행했다. 장태수는 이에 항거하여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스스로 남강 거사(南岡居士)를 칭하며 은거하였다. 관직 복귀 후 목도한 경술국치, 또 다시 낙향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 일제가 대한제 국 침략을 본격화하자 그는 다시 관직으로 나갔다. 조정에서 복귀를 요청하는 여러 번 의 권유도 있었지만, 국망의 상황을 극복하 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는 의지가 작용한 것 으로 평가된다. 그리하여 고종(광무황제)을 측근에서 모시는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이 장태수의 문집인 『일유재고(一逌 齋稿)』  장태수 초상화(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