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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심대섭(심훈) 선생 59 이야기며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는 소식 을 거기서 들었는데, 선생은 나를 막내아들 만치나 귀여워해 주셨다.” 3 · 1운동에 참여한 뒤 신채호와 이회영을 만나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시기 신채 호와 이회영은 일제와 어떠한 형태의 타협 도 거부하는 절대독립론, 독립운동 방략으 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심대섭 이 일제와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민족독립을 부르짖는 주옥같은 항일 문학작품을 남겼던 배경이 바로 여기 에 있었다. 이후 그는 상해, 남경(南京) 등을 거쳐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지강(芝 江)대학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학하였 다. 지강대학 유학 중 특이한 점은 연극에 관심이 컸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언론 운동하다 가 퇴사. 일본으로 가 영화 공부 1924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 였다. 이제 비로소 뜻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지면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는 1926년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사건으로 동아일보를 퇴사하게 되었다. 철필구락부는 1924년 11월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만 든 언론운동단체였다. 1925년 4월 철필구락 부는 같은 언론운동단체인 무명회(無名會)와 공동으로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하여 일제 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들 은 임금 인상 투쟁을 전개하여 신문사 경영진 을 자극하였다. 나아가 이듬해에는 일제의 언 론탄압에 항의하여 언론옹호 연설회를 개최 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철필구락부는 해 산되었고, 거기에 참여했던 다수의 기자들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바로 이때 동아일보사 심훈 시집 『그날이 오면』의 검열(‘삭제’ 적색 표기) 부분(심규상 제공) 동아일보의 「상록수」 연재 기사(당진 필경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