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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기하(梁基瑕) 선생 59 만주 침략한 일제의 도발에 맞서 조선혁명 당과 국민부, 임전태세 강화 조선혁명당은 재만 한인동포에 대한 자치 행정기관인 국민부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항 일 무장투쟁 등 군사적 임무를 전담하던 조 선혁명군을 지휘 통솔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 · 정·군의 체제로서 서로 유기적 관계를 형 성하고 있었는데, 양기하는 이들 조직 모두 에 관여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 침략을 도발한 일제 는 통화 · 유하 · 환인(桓仁) · 신빈(新賓) · 청원(淸 源)·해룡(海龍)·금천(金川) 등 중국동북 동3성 (省)의 수도(首都)와 현읍(縣邑)을 점령하고, 북만주 지역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 지역의 조선혁명군 및 중국의용군 등 항일 무장단체 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일본 경찰대와 중국 지방경찰 협공에 맞서 교전 중 관전현에서 순국 조선혁명당 · 조선혁명군 · 국민부 간부들은 1932년 1월 하순 신빈현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위와 같은 일제 침 략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 중대회의를 개최했 다. 그러나 오히려 밀정의 밀고를 받은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주요 간부들이 대거 피체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후 양기하는 양 세봉(梁世奉)·고이허(高而虛) 등과 조선혁명 당 · 조선혁명군·국민부의 조직 재정비에 착 수하여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의 중책을 맡 았다.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은 고이 허,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은 양세봉이 맡아 당 · 정 · 군의 조직을 재건하면서 국민부와 조 선혁명당 · 조선혁명군의 치열한 항일 무장투 쟁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32년 2월 10일 압록강 건너편 관전현(寬甸縣) 하로하(下露河)의 연강촌(連 江村)에 주둔하고 있다가 조선총독부 평북 초 산(楚山)경찰서 경찰대와 중국 지방경찰의 이 른 새벽 기습협공을 받고 말았다. 결국 격전 끝에 10여 명의 조선혁명군 부하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