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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안창호 선생 59 했다. 이듬해에 이갑(李甲) · 양기 탁(梁起鐸) · 신채호 등과 함께 항 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 직하고, 『대한매일신보』를 매개 로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대 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 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 힘쓰 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 립하였다.또 청년학우회를 조직 하여 민족 지도자 양성에 힘쓰 는 등 여러 방면의 활동을 전개 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의거가 일어나자 그 배후로 지목되어 용산 헌병대에 잡혔다. 3개 월간 고초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기회 에 중국 ·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른 바 ‘105인사건’으로 신민회 · 청년학우 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 직했다. 1919년 3 · 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 (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합하고 정부 청사를 마련하였다. 내무총장 · 국무총리 서리 · 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 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의 분열로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 러났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 회의에서 부의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 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다. 1926년에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 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했다. 중국 동북지역(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1932년 윤봉 길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특공작전으로 일 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서대문 · 대전형무소 등에서 2년 6개월을 복 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3월 10일 순국하였다. 안창호의 독립운동 방략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안창호는 어느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기념 촬영. 앞줄 가운데 안창호, 왼쪽은 신익희(1919.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