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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영월엄씨대종회보 40호 차손자(次孫) 종식(宗植)을 데리고 전투가 치 열한 호남으로 가시며 충의심으로 격문을 띄우 니 의병 수천 명이 따랐다. 삼성당공(三겛堂公) 현( )공은 항상 싸움의 선봉에 나서 전투마다 그 전과가 혁혁하셨다. 도주하는 왜적을 쫓아 해남(海南)에 이르러 대 진(對陣)하게 되었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 이어서 보급이 여의치 못하고 의병과 마필이 굶 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 퇴진, 전열을 다 시 정비하시고, 11월 초닷새 날 야간공격을 펼 치셔 용전분투(勇戰奮鬪) 하시다 순절(殉節) 하셨다. 임진왜란(壬굪倭갺) 승전에 더 크게 기 여하실 기회를 너무 일찍이 마감하셨으니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수행하던 자손과 의병들이 울며 시신(屍身) 을 수습(收拾)하여 고향인 이천(괿川)으로 운 구(運柩) 하던 중 영암(괈巖) 월출산(月出山) 아래 누리재(累里峙)에 당도하니 일기불순(日 氣不順) 하고 모두가 기진하여 더 나가기 어려 워지자 월출산(月出山) 자락에 봉분(封墳)을 만들어 안장(安葬)하였다(현재 전남(全南) 강 진군(康津郡) 성전면(城田面) 월남리(月南里) 산山 1번지). 자손들은 이천(괿川)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 성당공(三겛堂公) 현( )공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도강현(道江縣) 지하리(趾下里 : 현재 전 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병영면(兵營面) 하고 리(下古里))에 자리를 잡아 입향조(入鄕祖)가 되어 마을을 이루고 삼성당공(三겛堂公)의 시 제를 모셔 온다. 자손이 차차 번성함과 시류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인근의 영암, 장흥, 해남, 진도, 나주, 목포, 여수, 서울, 경기 포천, 강원 삼척 등 전국 각지 는 물론 외국에도 정착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계, 교육계, 관계, 군계, 경찰계, 금융계, 언론 계, 기술계, 의료계, 실업계, 예술계, 체육계 등 각계에서 삼성당공(三겛堂公) 후손들이 활발하 게 활동하고 있다. 삼성당공(三겛堂公) 묘역(墓域)에는 삼성당 공(三겛堂公)과 배(配) 의인(宜人) 분성(盆城) 김(金)씨의 쌍분(雙墳)묘, 부(父) 기묘유현(己 卯儒賢) 생원(生員) 용공(用恭)공과 모(母) 풍 양(豊穰) 조(趙)씨 합장(合葬)묘, 장자(長子) 백(伯)과 배(配) 순천(順天) 박(朴)씨 합장(合 葬)묘가 모셔져 있다. 다. 삼성당공(三겛堂公)계 보력(譜歷) 1. 무진보(戊굪譜) 엄문(嚴門) 준대동보(準大同譜) 성격의 최초 보첩(譜諜)은 1748년 영조 24년 솔례(겢禮)에 서 도유사(都有司) 린(璘)공에 의해 간행된 무 진보(戊굪譜)다. 초간본(初刊本) 천·지·현(天·地·玄) 3책(冊) 과 중간본(重刊本) 천·하(天·下) 2책(冊)이 같 은 해에 시간차를 두고 현풍(玄風) 솔례(겢禮) 에서 잇달아 발간되었다. 초간본(初刊本) 3책(冊)은, 전편(前編)에 복야공(僕射公)파를 3권(卷) 으로 편집하여 천(天) 책(冊)에 1권(卷)을, 지 (地) 책(冊)에 2권(卷)과 3권(卷)을 차례로 합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