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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2024년 10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밝힐 인재를 기른다’는 뜻으로, 직접 지었다. 1908년 신민회 회원으로 북간도교육단을 이끌고 용정촌(龍井村)으로 이주해 온 정재면 (鄭載冕)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다. 김약연은 정재면을 근대적 신교육기관인 명동서숙 교 사로 초빙하였고,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예배를 보게 한다는 조건으로 교사직을 수락하였다. 명동 촌은 신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교육을 하 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1909년 4월 에는 명동학교(명동야소교학교)로 개칭하였 고, 김약연이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3월 중학부를 증설하고 황의돈(黃 義敦) · 장지영(張志暎)·박태환(朴兌煥) · 김철(金 喆) 등을 초빙해 민족교육의 수준을 끌어올 렸다. 1911년 함북 성진의 캐나다 선교사 그 리어슨(Robert Grierson)이 파견한 북간도 (현재 중국 연변) 선교단 일원으로 명동촌을 방문한 이동휘가 ‘여성이 깨어야 나라가 독 립한다’라며 여성교육을 권유해, 그해 3월 명 동여학교가 병설되었다. 북간도는 물론 국내 및 만주 각처와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통해 북간도 최고의 민족학교로 성장했으며, 명동 지역은 만주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 다. 당시 작문 시간에 ‘애국’, ‘독립’이란 낱말 이 들어가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간민교육회 간사, 간민회 회장으로 북간도 민족운동 주도 1909년 9월 청 · 일 간에 이른바 ‘간도협약 (間島協約)’이 체결되고 일제의 간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10년 3월 간민교육회(懇民 敎育會)가 설립되었고, 이때 간사로 임명되어 민족의식 고취와 경제력 향상 및 항일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 어나 ‘연성자치제(聯省自治制)’와 민주공화제 실시라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자 간도 지역 의 한인들도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교 육회는 1913년 4월 간민회(墾民會)로 개편하 고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주 한인 현재 명동촌에 세워진 ‘명동학교 옛터기념관’과 김약연 흉상(이상 규암독립사 상연구소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김약연이 1908년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인 북간 도 명동촌에 설립한 명동서숙의 창립 직후 모습. 시인 윤동주, 독립운동가 송 몽규, 영화배우겸 감독 나운규, 고 문익환 목사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