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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해외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화 이동휘는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 (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 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 전도활동을 계 속하며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 시켰다. 또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항일광복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 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했 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 립했다. 이상설(李相卨)에 이어 2대 정도령(正 都領)에 취임하여 광복전쟁계획을 총지휘했 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 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광복전쟁계획 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러시아당국은 일제 당 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비롯한 20명의 한 인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명령을 내 렸다. 그는 북간도로 이동하여 중국과의 연 합을 통한 대일(對日)전쟁계획을 추진했지만, 1915년 중국이 일본과 21개조문제를 타결하 게 되면서 이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1917년 3월 러시아 2월혁명 소식을 접한 이동휘는 10월혁명 이후 볼셰비키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18년 4월에는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 드라·유동열·김립·오성묵·오와실리·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 戰) 선전, 한인(韓人)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했 다. 특히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는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볼세비키파인 적군(赤 軍)과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가하여 반혁명파 인 백위파군(白衛派軍)과 싸웠다. 결국 반수 이상의 희생자를 냈지만 국권상실 후 재러 한 인이 전개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1918년 8월 초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 국 제간섭군의 개입으로 시베리아와 러시아 원 동지역의 볼셰비키정권이 붕괴되고 간섭군의 지원을 받은 백위파정권들이 들어서자, 한인 사회당은 불법화되었다. 이에 북만주의 오지 (奧地)로 도피하였다. 통일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1919년 3 · 1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 과 국내외 임시정부의 조직자들은 미국 등 서 구열강과 파리강화회의에 큰 희망을 걸고 독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관련 자료(1918년, 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