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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진무 선생 57 1920 년대 후 반 만주 지역 독 립 운 동 계를 하 나로 통 일 하 자 는 민족 유 일 당 운 동 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28년 12월 북만주를 총 괄 관할할 혁신의회가 성립되고, 1929년 4월 1일에는 남만주를 총괄 관할하는 국민부(國 民府)가 성립하였다. 국민부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만들어 이당치국(以黨治國)의 형태로 만주독립운동계를 이끌어 갔다. 이때 이진무는 국민부 계열의 조선혁명군 소속 독 립군으로 편입되었다. 남만주의 맹장, 평양형무소에서 형장의 이 슬로… 1931년 2월 7일 뜻한 바 있어 국민부를 탈 퇴하고, 안국형·홍학순·최영걸 등과 함께 노 동자위군(勞動自衛軍)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 는 그해 (음)4월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 人革命軍)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동지들과 수 차에 걸친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 1932년 1월 10일 부하인 안국형과 박인홍이 체포되 고, 16일까지 나머지 단원들과 함께 일제 첩 자의 계략에 속아 연이어 붙잡혔다. 1933년 6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부 하 홍학순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 후 “구태여 우리들이 한 일을 변명할 필요가 없고, 또 그만한 것은 각오한 것이니 항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1934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이진무의 오랜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실상을 보도한 「직접 행동 십 여년의 이진무 등 8명의 공판」 기사(1933년 6월) 「이진무 홍학순엔 사형」 이진무 사형 보도 기사(『조선중앙일보』 1933.3.9) 이진무·홍학순 등의 신의주법원 공판 장면(『동아일보』 193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