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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구연영 선생 57 창함에 따라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 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직후부터는 이천·광주·여주 등지를 돌며 구국회를 기반 으로 군중 집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으며, 을사늑약 철회를 촉구하였다. 또 국권 수호를 위한 인민의 단결을 호소하 고 시장 철폐 등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하 기도 하였다. 부자(父子) 순국 을사늑약 이후 이처럼 이천을 중심으로 경 기도 여주, 광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선도 하게 되자, 일제 침략세력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 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자 구정서(具禎書)와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일본군의 심문 을 받자 “이 땅에 와서 너희가 이처럼 무도한 강도질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심하실 줄 아 느냐. 동지들을 말한다면 일진회 놈들을 빼 고는 모든 백성이 나의 동지들이다”라고 일 제의 죄상을 당당히 성토했다. 구연영은 결 국 구정서와 함께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 총살을 당해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당시 구연영은 향년 44세였고, 구정서는 25 세였다.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이천중앙교회 경내에는 1979년에 건립된 순국추모비가 있 고, 이천시 창전동에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민족운동가 구연영 순국기념비’(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독립기념관 제공) 구연영 부자가 총살된 이천장터의 1910년대 모습(이천문화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