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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종진 선생 57 의를 개최하고, 같은 해 7월 21일 한족총 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였다. 한족 총연합회의 조직체계는 먼저 각 지역에 농 무협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자유로 연합하 는 방식이었다. 한족총연합회는 재만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이 주체가 되어 조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부는 영안현(寧安縣) 산시역(山市驛) 앞에 두었다.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의 자주자치적 협 동조직체를 표방한 한족총연합회는 위원장 에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이 추대되었 다. 이 외에 농무 및 조직선전에 김종진, 교육 이을규, 군사 이붕해 등 측근 동지들이 각각 차장으로 임명되어 조직을 운영하였다. 한족 총연합회는 과거 단체들처럼 권력이나 위세 를 부리지 않고 동포들의 토지교섭은 물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해주어 각 지역으 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조직정비가 완료되면 서 한족총연합회는 조직과 간부를 훈련시키 고자 북만중학(北滿中學)을 빨리 운영하고자 하였다. 학교 설립을 통해 경제와 교육이 유 기적인 관계를 맺는 안정적인 농촌사회를 만 들려고 노력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 속에 만주에서 순국 한족총연합회의 발전에 공산주의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한번은 농민들을 모아 놓고 양자간의 공개토론회를 열었는데, 공 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규탄하자 청중들이 환 호하였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백정기 등이 논의를 거듭한 끝에 천진 시내에 있는 중·일 합작은행인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털어 활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결국 이 은행 습격에 성 공하여 1930년 9월경 정화암 · 백정기 · 김지 강 · 장기준 · 양여주 · 이규숙 등 15명이 만주를 향해 떠났다. 원군을 맞이한 한족총연합회는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 하였다. 이들은 농민 위에 있지 않고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괴로움을 나누며 함께 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농민들 의 지지를 받았다. 한족총연합회는 모든 것 을 한인 교민들의 자치로 결정하기로 하고, 1 년에 한 번씩 각 지역 대표자 총회를 열어 모 든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한인들의 단합과 생활안정 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김종진은 1931년 7월 11일 해림역(海林驛) 근처에 있 는 조영원(趙永元)의 집에 갔다가 공산주의 자들에 의해 어디론지 납치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김종진이 피살된 곳 부근의 중국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역(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