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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장태수 선생 57 식년문과 급제 후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 전통적으로 선비가 불의와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처신하는 방법은 세가지가 있었 다. 첫재는 불의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거의론(擧義論)이요, 둘째는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하며 도(道)를 지키는 거수론(去 守論)이요, 셋째는 목숨을 바쳐 불의에 저항 하는 치명론(致命論)이다. 대한제국기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거의 론은 의병항쟁으로, 거수론은 전통 한학(漢 學)의 전수를 통한 민족교육운동으로, 치명 론은 의열투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의열투쟁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침략자 와 그 앞잡이를 처단하거나, 침략 행위에 대 해 항거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독립운동 방략을 말한다. 국망의 위기 속에 1910년 경 술국치(庚戌國恥) 직후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 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홍범식 · 황현 · 김도 현 · 이만도 · 김석진 · 송병순, 그리고 장태수(張 泰秀) 선생의 의열투쟁도 그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하 였다. 이후 의열투쟁은 물론 구국운동의 물 핵심공적 1910년 8월 일본이 대한제 국을 강제병합한 뒤 은사금 을 주는 것을 거절하여 체 포하려 하자 이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하였다. ■ 건국훈장 독립장 장태수 선생 1910년 한일강제병합 항거 일제 은사금 거부 단식 24일 끝에 순국 을미사변 · 단발령에 관직 사직 “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 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不 忠)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 효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 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 순국 당시 선생의 유언 글 편집부 주요약력 ● 1841년 12월 24일 전북 김제 출생 ● 18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 1867년 경남 양산군수로 군사 양성 ● 1895년 단발령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직 ● 1904~5년 시종원 부경(副卿), 중추원 의관을 맡음 ● 1905년 11월 ‘을사5적’의 처단을 상소 ● 1907년 김제군 서도리에 신명학교 설립 ●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병합 은사금을 거절 ● 1910년 11월 27일 단식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