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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약연 선생 57 1899년 2월 18일 종성에서 김약연의 전 주 김씨 가문 31명, 문병규의 남평 문씨 가 문 40명, 김약연의 스승 남종구 가문 7명, 회 령 출신 김하규(金河奎)의 김해 김씨 가문 63 명, 그리고 안내자겸 통역관인 김항덕을 포 함해 142명이 두만강을 건너 지린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불구라재로 집단 이주하였 다. 사전에 중국 국적으로 입적한 이들을 앞 세워 불구라재의 중국인 토호 동한(董閑) 3형 제 소유의 땅과 임야(1천일경[耕])를 사들였 다. 1900년에는 파평 윤씨 윤하현(尹夏鉉, 윤 동주의 조부) 가문 18명이 개산툰 자동(紫洞) 으로부터 불구라재로 이주 합류하였다. 이들 네 가문은 장재·용암·대룡·영암 등 4개 촌을 개척하고 동쪽을 밝힌다는 뜻에서 ‘명동촌’ (明東村)이라 이름했다. 1901년 4월 명동촌 의 한인들은 후세 교육을 위해 5만 평의 토지 를 매입해 이를 기반으로 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재(圭巖齋)’라는 서당을 세웠고, 대룡동 에는 김하규가 ‘소암재(素岩齋)’를, 중영촌에 는 남도천이 ‘오룡재(五龍齋)’를 세웠다. 1907년 김약연은 김영학·강백규·구춘선· 유찬희·마진 등과 간도교민회를 조직하여 한 인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교육계몽, 민족정 신 고취에 노력했다. 한편 중국(淸)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소유권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등 한인 권익옹호에 주력하여 한인 사회 지 도자로 부상하였다. 명동서숙 설립, 명동학교로 개칭하고 여학 교도 병설 1906년 12월 설립자 교장 이상설(李相卨) 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사실이 알려지며 용 정(龍井)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서전서숙(瑞 甸書塾)이 폐쇄되었다. 이에 일부 교원과 학 생들이 명동촌으로 옮겨왔다. 이에 서전서숙 을 계승할 신교육 기관으로 불구라재의 여러 서숙을 통합해 1908년 4월 27일 용암동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장 에 취임하였다. ‘명동(明東)’은 ‘동국(한국)을 명동촌 약도 최근 명동촌 일대 전경(이상 김재홍 제공). 오른쪽 멀리 ‘선바위’ 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