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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심대섭(심훈) 선생 57 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대회를 거행했다. 이 후 서울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 를 전개함으로써 3 · 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심대섭은 바로 이러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 민중대회에 참여하였고, 이 어 서울 각지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적극 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서울에 서 각급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대의 시 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시위운동에 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만세시위 운동 과정에 서 조선총독부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 족 독립의 열기를 힘껏 분출하다가 조남천·손 덕기·최강윤 등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경 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8월 30일 경 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을 거쳐 정식 재 판에 회부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 반’ 혐의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따라 석방되었지만, 그는 이미 미결기간까지 포함하여 약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옥중에서도 그의 민족 독립을 향한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투옥 중, 어머니를 위로하고 조국 독립에 대 한 결의를 다진 다음과 같은 옥중편지에도 잘 드러나 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 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 머님(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 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심대섭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곳곳에 일제 당국의 검열 흔적이 남아있다(상록수문 화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