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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안공근 선생 57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의 거 직후 중국 대련(大連)에서 안중근 의사 를 면회하고, 사형이 집행된 후 여순(旅順) 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이후 일제경무 당국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해외로 망명하였다. 형 안정근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망명 형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중국 연변)를 거쳐서 블라 디보스토크로 들어갔고, 안중근 의사의 주 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 (煙秋)로 옮겨가 안창호의 도움으로 정착하 였다. 1912년 6월부터 러시아의 상트페테 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 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14년 4월경에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로 돌아와 안정근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 던 중 1914년 9월에 밀정 김정국 처단사건 을 주도하였다. 이후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 쓰기도 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 1920년 1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러시 아 외교특사로 선정되었고, 1921년 7월 임시 정부 최초의 러시아대사가 되었다. 1921년 4 월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어 1922년 초 모스 크바에서 이동휘 · 김규식 ·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활동을 벌였다.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 독립운동촉성회, 한 국독립당 등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안창호가 주도한 민족운동 단체 통일운동인 민족유일당운동을 적극 지지하 였고, 밀정 암살 등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 팔인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일본의 중국 동북지방(만주) 침략사태인 ‘만주사변(일명 9 · 18사변)’이 발 안중근 의사(중앙)의 빌렘신부(안의사 맞은편 등진사람), 동생 정근 · 공근(왼 쪽)과의 옥중 면회장면(연합뉴스 제공). 안정근 · 안공근의 안중근 의사 면회 사실을 보도한 신문 기사 「형제상봉」(국가 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