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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동휘 선생 57 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다. 후일 그의 청렴 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고종(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되어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 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승진을 거듭하며 국방요충지인 강화 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했는데, 군인들은 물론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 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 이 가속화되자,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 고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운동에 헌신했다. 얼마 후 일제에 의해 강제 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 고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광무황 제 · 2천만동포형제 · 진신(縉紳) · 법관(法官) · 을 사오적 · 각국 공사관 사절 · 주한일본공사 하 야시(林權助)·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 谷川) 앞으로 보내는 8통의 유서를 작성했으 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 을 빌미로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뒤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대항하 여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일제 당국은 그를 배후조종자로 체포했으나, 그 해에 석 방하였다. 그 뒤 서북학회(西 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지 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 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전 도사로서 함경도 일 대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도 하였다. 그는 강제 ‘한일합병’을 앞 둔 1910년 8월 초 한 국통감부 당국에 의해 또 한번 예비검속 되었 다가 ‘한일합병’ 선언 후에 석방되었다. 1911 년 3월 다시 안명근·양기탁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총감부에 체포되어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뒤, 1913년 2월 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중국 연변)로 탈출 하였다. 강화진위대장 시절의 이동휘(앞줄 가운데) 이동휘 가족. 앞줄 가운데가 부친 이승교, 뒷 줄 왼쪽이 이동휘, 오른쪽은 부인 강정혜 (이 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