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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기하(梁基瑕) 선생 57 운동계의 초미의 관심거리였 다. 이때 신익희·손정도 · 연병 호(延秉昊) 등과 더불어 1922 년 3월 11일 임시의정원 회의 에서 “우리의 조국을 광복하 려는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 강 령·방략·정책을 원만히 협의하 여 적법 또는 합리적으로 신속 히 실행하기 위하여 내외 각지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와 내외 각지의 신망과 지식이 특저(特 著)한 인사를 망라한 대회의를 가능한 빨리 소집할 일을 임시 정부에 건의”할 것을 제안하였 다. 이후 줄곧 국민대표회 소 집과 그를 통한 임시정부 개편 입장을 견지하였다. 특히 임시의정원과 국민대 표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 備委員會) 사이의 대립이 심화 되어 국민대표회 개최 문제가 답보상태에 빠지자, 그 해 7 월 안창호 · 신익희 · 김구 · 조소앙(趙素昻) · 이시 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 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 원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 민대표회를 조기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명실 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총괄기관으로 거듭 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그럼에도 1923년 1월 3일부터 5월까지 개 최된 국민대표회는 임시정부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첨예화 되어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임 시정부는 더욱 위축되었다.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동 이같은 독립운동계의 난맥상에 상심하여 한중교류문화원이 국가보훈처와 협력하여 2018년에 개수한 양기하 흉상과 묘역(안상경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