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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박원희 부부와 동생 김사민의 비극적 서사 57 년 9월 29일 예심에서 면소되어 석방되었다. 당시 박원희는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동양학원을 통해 항일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거점학교를 만들 려고 한 그들의 희망을 산산히 부수고 말았다. 김사 국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주 영안현(寧安縣) 영 고탑(寧古塔)에서 대동학원을 설립하는 활동을 전개 하였으나, 이 또한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사국은 1924년 5월 폐병이 걸린 상태에서 귀국하 여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박원희는 1924년 5월 4일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총회에 참여하고 5월 10일 창립총회에서 허정 숙, 주세죽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여성동우회 는 “우리 조선의 무산여성은 현재의 이중노예의 상태 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의 장문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박원희는 1925년 1월 11일 서울청년회 제4 회 정기총회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은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립되는 등 서울파와 화요파의 대립이 한창일 때였다. 박원 희는 1925년 2월 21일 서울파의 여성단체인 경성여 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녀는 3월 8일 경성여자청 년회 발회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국제여성의 날에 대 한 강연을 하였다. 불행하게도 1926년 5월 9일 서울 파의 지도자인 남편 김사국이 폐결핵으로 35세의 젊 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에게는 이제 갓 돌이 지 난 딸 사건(史建)이 있었다. 이같은 극한적 상황에서 도 그녀는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을 이어 나갔다. 1927년 4월 26일 신간회의 자매조직인 근우회의 발기 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중앙여자청년동 맹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5월 27일 근우회가 창 립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녀는 전국 을 순회하며 여성해방과 사회운동에 매진하였다. 박 원희는 1927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상설론 을 주장하는 등 김사국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 서울 파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1928 년 1월 5일 3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박원희와 김사국의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의 공적 을 인정하여 2000년과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또 한국전쟁 무렵 행방불명되어 사망한 김사민에게는 2009년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이 글은 안미경, 「1920년대 박원희의 여성해방 운동과 여성해방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4, 2013과 필자의 「해광 김사국의 삶과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3, 2002 ; 『1920년대 한국사 회주의운동연구』, 선인, 2006 ; 「일제강점기 김정기 의 삶과 항일운동」, 『화성독립운동연구』 2, 2020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충남독립운동사3 : 1920-40년대 국내 독립운동』, 2021 등을 참고함) 필자 전명혁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학연구소 소장, 민주화운 동기념사업회 사료관과 연구소 책임연구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전문위원,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부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대 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운동연구』(선 인, 2006) 및 『형사판결문으로 본 치안유지법 사건과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 (선인, 2020), 『일제강점기 국내 민족주의·사회주의운동 탄압사』(동북아역사재 단, 2022, 공저), 『1919년 3월 1일을 걷다』(서울역사편찬원, 2019, 공저) ; 「해 광 김사국의 삶과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3, 2002 등 다수의 논저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