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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할 것을 주청하였다. 한편 이날 전 참판 민종 식(閔宗植)이 하인 김완규를 대동하고 이설이 묵고 있는 집을 방문하였다. 민종식은 이설 을 방문하여 상소문 작성을 의뢰하였던 것이 다. 그러나 이설은 민종식이 부탁한 상소문 을 작성하여 12월 4일 그에게 건네주기 직전 김복한과 함께 체포되어, 경무청 감옥에 구 금되고 말았다. 경무청에 구금된 다음날인 12월 5일 이설 은 일본인 고문관 와타나베[渡邊]의 공초를 받았으며, 30일에는 경무국장 박승조의 공초 를 받았다. 이설은 이 자리에서도 중봉과 청 음의 고사를 들어 역신을 토벌할 것을 역설 하였다. 박승조가 “비록 그러하나 시국은 그 러하지 않다.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나와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후학을 계발함만 못하다”고 훈계조로 말하였다. 이 에 대해 이설은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의병을 일으켜 매국적을 토벌하고자 함을 분명히 밝 혔다. 그는 2월 1일(음력 1월 8일)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이설의 상소운동은 와병 중에 군사를 일 으켜 왜적을 토벌할 형편이 못 되는 상황에 서 취할 수 있었던 최상의 방편으로서 ‘거의 토적(擧義討賊)’에 버금가는 구국의 결단이었 다. 더욱이 그는 귀향한 후 안병찬 등과 협의 를 하여 민종식을 영수로 한 제2차 홍주의병 을 일으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의병에 대해 묻는 안병찬의 편지에 다 음과 같은 답신을 하며 독려하였다. “형(안병찬)도 그렇고 그렇단 말인가. 목의 피가 이미 빠지고 다시 뿌릴 만한 피가 없어 서 그러는가. (중략) 천하에 혼자 싸우는 장군 은 없으니 내가 비록 뜻이 있지만 누구와 더 불어 일을 한단 말인가”(이설,「與安稚珪書」, 『復菴集』 권6). 또한 이설은 민종식에게도 편지를 보내 안 병찬과 임승주 등이 민종식을 영수로 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 록 책임을 맡을 것을 권했다. 아울러 1895년 거사 때에 미리 통고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도 전하였다. 그러나 건강상 직접 거병할 수 없었던 그는 홍주의병의 재기를 기대하고, 동지들의 거의를 권하였다. 이설은 병이 악화되자 마지막 상소인 ‘유 소(遺疏)’를 작성하여 문인인 이병량(李秉良) 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나 홍주의진이 홍주 성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던 1906년 5 월(음력 4월 29일) 일제를 축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 이래 서인계열 호론(湖論)의 학 통을 계승한 이설은 위정척사론에 철저했으 며, 척왜론(斥倭論)과 대일결전론을 실천에 옮 긴 관료이면서 현실비판적인 유학자였다. 동 시에 민족의 위기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 민족운동가였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