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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24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안중근 의사의 아우로 수난 겪어 안공근(安恭根) 선생은 1889년 7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 진사와 조씨 사이에서 3 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 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안삼재(安三才), 조 한용(趙漢用) 등의 이명을 쓰기도 했다. 1906 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 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핵심공적 1921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 년 12월 이후 상해한인교민 단장으로  활동했다. 1931 년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 윤봉길 의거를 지원 하였다. 1934년 낙양군관 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 는데 공헌했다 ■ 건국훈장 독립장 안공근 선생 친일분자 처단과 의열투쟁 · 독립군 양성 주력 불행히 1939년 충칭서 실종 안중근 의사 아우로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앞장 안공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두 번째 동생으로, 평 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6년 5월 중국 상 해에서 이유필·최창식·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 진회를 결성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 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인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30 년대 이후 백범 김구의 재상해(在上海) 대표격(측근) 으로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것을 비 롯하여 1935년까지 한국독립당, 1937년까지 한국 국민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주로 친일분자 처 단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 후인 1937년 8월에는 한국국민당 당원 및 중국 특 무대원들과 함께 상해로 잠입하여 항일신문사를 방 문, 한중연합을 제창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글 편집부 주요약력 ● 1889년 7월 11일 황해도 신천 출생 ●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참가 ● 1920년 10월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 員) [러시아 외교특사]    ● 1921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 ● 1926년 2월 상해한인교민단장  ● 1931년 한인애국단 결성 ●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동 ● 1936년 임시정부 상임 국무위원, 황해도 의원 ● 1937년 2월 한국청년전위단 결성 ● 1937년 8월 한국광복군운동단체연합회 결성 ● 1939년 5월 30일 충칭(重慶)에서 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