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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한말 구국운동의 선봉에서 이동휘(李東輝)는 1873년 6월 20일 함남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후일 호 를 성재(誠齊)라 했는데, 이명으로 이각민(李 覺民)을 쓰기도 했다. 아들을 아전(衙前)으로 출세시키고자 했던 부친 이승교(李承橋)는 그 를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 (通引)으로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통인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 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 고 대담하게도 동헌(東軒)으로 뛰어들어 화로 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다. 사건 직후 서울 핵심공적 1902년 이후 대한제국군 강화진위대장으로 활동했 고, 1907년 군대해산 무 렵 연기우 등과 강화도에 서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1913년 초 북간도(중국 연 변)로 망명했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결성했으며,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 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했 다. 1922~23년에는 국제 공산당의 꼬르뷰로 및 오 르그뷰로(조직국)의 책임 자로 활동했다. 주요약력 ●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 출생 ● 1906년 강화도에 보창학교 설립 ● 1907년 강화도에서 의병항쟁 ● 1908년 신민회 활동 ●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 2대 정도령(正都領) ● 1918년 4월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 조직 ● 1922년 국제공산당 꼬르뷰로(高麗局) 책임자 ●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병사 ■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동휘(李東輝) 선생 초대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이 필사(畢死)하기까 지 최후의 일인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정의와 인도를 표방하여 우리 독립을 국제연맹에 요(要)함도 물론 외교상에 일수단이어니와 나는 우리 독립을 단순한 외인(外人)의 찬조에 의뢰함보다도 내가 혈로써 우 리 자손 억만대의 광영이요 행복되는 완전무결한 독 립을 사려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최후혈전이라야 반 드시 영원한 독립을 성공하리라 하노라.” - 1919년 11월 4일 『혁신공보(革新公報)』 특파원과 인터뷰 한 내용 중에서 글 편집부 독립전쟁론 펼치며 무장독립운동 주도 한인사회당 창당 등 사회주의운동도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