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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24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본다 대상으로 제국주의의 정복과 착취를 비판하고,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조직이 무산계급의 피와 땀을 착취 하고 교육을 독점하기 때문에 ‘현대교육혁명’이 필 요하다는 취지로 1923년 8월 「하계대학」을 개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하계대학의 강사로는 일본 의 유명 대학을 수학했던 서울파 계열의 사회주의운 동가 최창익, 김영만 등이 사회학과 사회운동사 등 을 강의하고, 방한민이 경제발달사를 강의할 예정이 었다. 동양학원의 교장은 김정기가 맡았고 방한민은 교무주임을 맡았다. 김사국의 아내인 박원희가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용정 일본영사 관 경찰은 동양학원의 활동 을 주시하고 있었다. 1923 년 7월 4일 동양학원의 운 영 책임을 맡은 뒤 건축비 를 마련하기 위해 김정기, 박원희 등이 전조선순회강 연단을 조직하여 함경북도 회령에 도착한 날 이들을 체포하여 용정의 간도총영 사관 경찰서로 호송하였다. 이후 일경은 동양학원과 방 한민의 집을 압수 수색하 여 십여명을 구속하고 폭 탄 30개와 선전문 다수를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일제 당국은 동양학원의 방한민 등이 1923년 8월에 북간도 의 용정과 개산둔(開山屯) 사이 철로 개통식에 참석 예정인 일본 관동도독부총 독을 살해하고 용정 등의 일본영사관 등을 폭파하여 일제 통치기관에 타격을 가하는 등 민중봉기를 계획 했다는 이른 바 ‘작탄매설사건(炸彈埋設事件)’을 조 작하였다. 이 사건으로 방한민은 징역 10년형을 선 고받았다. 박원희, 여성운동의 선구적 활동 박원희는 1923년 7월 4일 동양학원사건으로 체 포되어 함경북도 청진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1923 ‘조선사회운동의 선구자’ 김사국, ‘여성운동선구자’ 박원희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