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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진무 선생 55 단원인 이성돈의 권유로 대한 독립단 제2중대원이 되었다. 가입 후 유격대에 편성되어 평 북 창성군으로 진입하였다. 창 성군에서 목적지를 향해 야간 행군을 하던 중 일제 경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총격전으로 주변이 소란해지 자 유격대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본부로 돌아왔다. 이 국 내진입전 이후 압록강을 넘나들며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통의부 가입, 군자금 모집과 일경·주구 배 처단 1922년 초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의 독립 운동단체들은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 해 통합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족회(韓族 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 등의 독립군단들이 하나로 뭉쳐 대한통군부(大韓 統軍府)를 성립시켰다. 이어 같은 해 8월 23 일에는 광복군총영·대한정의군영·평안북도 독판부 등을 더 가입시켜 대한통의부(大韓統 義府)가 결성되었다. 이때 최석순(崔碩淳)이 중대장인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 소속원 이 되었다. 1923년부터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924년 초 동지 11명과 함께 국내로 진입 해 평북 선천군 동면 월봉동(月峯洞)에 소재 한 광산을 습격해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어 남면에 있는 일제의 삼봉동(三峯洞)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일제 경찰 들을 저격해 부상시키고 무기를 탈취한 뒤 주 재소를 불태워 버렸다. 주재소가 소각되고 경 찰이 중상을 당하자 일제는 선천군을 포함한 국경지방에 초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이진 무는 대원 4명과 함께 본부로 귀환했으나 다 른 7명의 대원은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대 원들의 진술에 따라 대략 이 시기부터 국경지 방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목(一目) 대장’ 또는 ‘흑선풍(黑旋風)’의 별명을 갖게 되 었다. 이 유격활동을 포함해 통의부 의용군 소속으로 10여 회 국경을 넘나들며 510여 원 의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일제 경찰대와 세 차례 전투를 벌였다. 정의부 의용군 · 조선혁명군 초급 간부로 수 십 차례 경찰과 교전 그는 1924년 11월 24일 결성된 정의부(正 義府)에 참여하였다. 초급 간부인 정사(正士) 통의부 중앙행정위원회에서 1925년 9월 ‘농촌공회통칙(農 村公會通則)’을 제정하여 포고하는 문서(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대한통의부 총장 김동삼 (1878~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