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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필주 목사 55 한 전투에 참가하여 분대장에 해당하는 참교 (參校)로 진급하였다. 그 후 신설된 훈련대로 전입되었다가 1895년 9월 훈련대가 폐지되 고 시위대가 신설되자 시위대로 전입하여 부 교(副校)로 승진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후 새로 초빙된 러시아 군사교관 밑에서 신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후일에 상동청년 학원과 공옥학교에서 체육 교사로서 군사교 련을 담당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1899년 김인숙(金仁淑)과 결혼 후 남매 를 낳아 안정된 생활을 하였으나, 1902 년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모두 잃고 기독 교에 입교하였다. 1903년 4월 스크랜턴 (W.B.Scranton)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상동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었다. 같은 해 가을 대 한제국 군대에서 제대하고 서울 상동교회(尙 洞敎會)의 예배당 청소일을 맡았다. 그 후 성 경공부와 찬송가를 열심히 배우고 사경회(査 經會)마다 출석하여 1904년 1월에 속장(屬 長)으로, 그해 여름에는 권사(勸師)로 임명되 었다. 상동교회 부설로 1904년 10월 15일 상동 청년학원이 설립되어 문을 열자 체육교사에 임명되어 같은 무렵 설립된 공옥소학교(攻玉 小學校)에도 노익형(盧益亨)과 함께 교사로 임명되어 한문·성경·체조 등 과목을 담당하 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구국계몽운동 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07년 2월 일제 가 침탈해간 철도 이권을 회수하기 위한 조 직된 광무사(光武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08년 6월 대한협회 교육부 간사원(幹事員) 을 맡았다. 정동교회 목사로 근무중 3 · 1운동 참여 1907년 4월 미국 북감리회 전도사 직분 을 받아 연화봉교회(蓮花峰敎會)·이촌동교회· 북장동교회를 개척·목회하였고, 1910년대 초 남·북감리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협성 신학교에 들어가 2학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1913년 3월 경성지방회 파송을 받아 서울 왕 십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15년 4월 25일 해리스(M.C.Harris) 감독이 주재하는 제8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집사목사(Deacon) 안수 이필주가 근무한 대한제국군의 훈련 모습 당시 전덕기 목사와 상동교회(이상 독립기념관 ·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