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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노응규 의병장 55 (反)외세·반(反)봉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 학농민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조선을 반 (半)식민지화해 갔다. 이제 조선 정부는 러시 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 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했다. 이에 일본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친일정권 을 사주하여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 환으로 단발령을 강제로 시행했다. 경남 안의에서 의병 봉기, 진주성 점령 위정척사사상을 품고있던 노응규는 ‘국모’ 의 원수를 갚고, 국왕을 보위하며,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거의(擧義)하기 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2월 19일 (음력 1월 7일) 경남 안의(현재 함양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수사(長水寺)의 승려 서재기 (徐再起)를 선봉장으로 삼고, 정도현·박준필· 최두원·최두연 등 문인, 임경희·성경호 등 지 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의병부대를 편성하 였다. 그리고 곧바로 경상남도의 행정·교통· 문화의 중심지이자, 지리적 요충지인 진주를 공략하기 위해 무기를 싣고 남쪽으로 가서 그 날 저녁 진주성에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 일 시에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당시 진주부 관찰사와 경무관은 대구로 도주하였고, 또 참 서관은 성을 탈출하여 삼가로 도주하였다. 노응규 의진이 진주성을 함락시킨 뒤 성안 에 주둔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부민들 또한 봉기하여 정한용을 의병장으로 추대하 고 성밖에 포진하였다. 이어 전 찰방(察訪) 오 종근, 전 수찬(修撰) 권봉희·정재규 등이 의병 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함으로써 진주의병 진의 규모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 라 노응규를 총대장으로 하는 진주의병진은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인근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즉 2월 27 일 선봉장 서재기를 파견하여 산청의 단성(丹 城)을 장악하게 했고, 뒤이어 하동·고성·함안 등으로 세력을 뻗쳤다. 그리고 대구로 도망가 있던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진위대 병사들과 일본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이를 두 차례에 경남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에 있는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 원, 경남일보 제공) 노응규 의병부대가 점령한 진주성의 촉석루 일대 전경(경 남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