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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종진 선생 55 에 입학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을 기 르기 위해 상경한 만큼, 선생은 교내외 교우 관계를 넓히는 데 진력하였다. 시내 각 학교 에 연락망을 구축하고 비밀출판 등의 활동을 전개하자,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점차 좁혀 들어왔다. 중동학교 재학 중 경찰 압박 받자 중국으로 건너가 이회영 만나 때마침 같은 안동 김씨 집안 친척의 형님 뻘인 김연진(金淵鎭)이 중국 봉천(奉天, 현재 심양)으로 잠입하여 국내와의 연락책임을 맡 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선생은 중국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0년 4월 서울을 출발하여 봉천 교외에서 김연진을 만났다. 그러나 국내로의 무기반입 계획이 발각되자, 중국 북경(北京)의 이회영을 찾아가게 되었 다. 북경 도착 후부터 심웅(沈雄)이란 이름으 로 성명을 바꾸고 북경에서 다양한 원로 독 립지사를 만났다. 그 중에는 홍성 의병의 노 장인 이천민(李天民, 일명 세영)을 비롯해 조 성환(曺成煥)·이광(李光)·박용만(朴容萬) 등 중 장년층과 최용덕(崔用德)· 박숭병(朴崇秉) 등 청년층 도 있었다. 이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듣고 일제와 대 항할 수 있는 군사적 학식 과 훈련을 쌓은 유능한 지 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신념 을 갖게 되었다. 이회영과 상의한 끝에 상해(上海)의 신규식 을 소개받은 김종진은 1921년 1월 말 상해 로 출발했다. 신규식은 손문과 친밀한 관계 를 유지하며 한인들의 무관학교 입교에 적극 적이었는데 운남성독군(雲南省督軍) 당계요 (唐繼堯)에게 간곡한 편지를 써주어 김종진이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운남군관학교)에 입 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운남강무당은 1907년 8월 귀주성(貴州省)에 주둔 중인 청나라의 신 군(新軍) 19진(鎭) 소속 군사간부 양성을 목적 으로 운남육군강무당으로 개교한 이래, ‘민 주혁명 전사’를 양성하는 신식 군사학교를 표방하였다. 1912년 운 남강무학교로 개칭되었 고, 19기에 걸쳐 약 5천 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 다. 1921년 4월 운남성 독군 당계요와 교장의 특 별한 지도와 관심으로 운 남군관학교 교도대에 편 입된 김종진은 개인교수 와 같은 특별지도대장을 운남강무학교(운남군관학교) 교사(독립기념관 제공) 운남강무학교 재학 당시 김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