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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기간(1919~1923년) 신채호의 민족자결주의 이해와 독립운동론 적용 55 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신채호에게 3·1운동은 국제 정치 역학구도 속에서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독립을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 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성토문」을 통해 이승만이 위 임통치 청원으로 3·1운동으로 일어난 ‘2천만 민중의 구용전진(舊勇前進)의 의기’를 꺾어놓았다고 비난했 던 것이다. 신채호는 민족자결주의를 한국 민족의 독립에 올 바르게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3·1운동으로 고 양된 ‘민중의 혁명적 기운’을 군사적인 성공으로 이 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 족자결주의가 적용되어 독립한 폴란드와 체코의 경 우에도 외교적 성공 이면에 군사력에 중심을 둔 혈 전용역(血戰力投)한 노력이 있었음에 주목했다. 그 리고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통해 한국인들도 이제 민족자결에 요구되는 군사행동의 시점이 임박 했다고 판단했다. 신채호는 교전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18세기 말엽 의 미국 독립전쟁과 19세기 초 유럽의 반도전 쟁(半 島戰爭)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나폴레옹군에 맞서 활약했던 스페인 농민 ‘게릴라’의 예를 들곤 했 다. 이는 신채호의 무장투쟁론이 국가 대 국가의 전 면전이 아닌 일제에 대한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상 정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미국 독립전쟁, 반도전 쟁 모두 비정규전을 중심으로 군사적 성과를 보여 준 뒤 외교적 방법까지 동원하여 외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사례였는데, 이는 신채호가 무장투쟁의 다음 단계에서 외교적 방법을 사용할 의도가 있었음을 보 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채호가 원했던 민족자결주의 의 독립운동방략 적용은 군사행동을 통해 민족의 자 결능력을 입증한 이후에 국제사회의 역학관계를 활 용하여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1919~1923년 당시 신채호가 상정했던 이러한 선무 장투쟁 - 후외교 방식의 독립전쟁론은 신채호가 자 신의 투쟁방식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던 1924년 가 을 무렵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진관사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신대한』 제1호(1919.10.28). 필자 서일수 중앙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 원을 거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주로 독립운동가들의  국제정세 인식과 일제강점기 도시사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주 요 논저로 「1919~1923년 신채호의 반임시정부 노선과 민족자결주의 인식」,『한 국독립운동사연구』43(2012) ;「필리핀에서 폴란드로, 파리강화회에서 전개된 대 미 독립청원의 외교적 포석」,『역사연구』35(2018) ; 「1930년대 해주의 도시기 반시설 확충과 ‘식민 권력’」,『한국사연구』 167(2014) ; 「‘도시민’의 모방과 경쟁,  1930년대 북선(北鮮)의 사례」,『역사연구』50(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