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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한용운 선사 55 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 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 된다. 그는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고백하였다. 또 소설 「흑풍」이 『조선일보』에 연재될 때 작 자의 말에서, “많은 결점과 단처를 다 둘러 보시고 글 속에 숨은 나의 마음씨까지 읽 어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히 없겠습니다” 라고 마음속의 뜻을 독자가 헤아려 주기를 원했다. 일송 김동삼 장례식을 심우장에서 치르다 1933년 55세 되던 해 백양사 승려인 벽산 (碧山)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 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그를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 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는데, 여기서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교우관계에서는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 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는 매우 깊은 의리 를 보여 주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 다가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 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1937년 3월 옥중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르기도 했다. 일제말기 최후의 발악적인 총동원체제 아 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 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 독립투사였던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 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 앞에 두고 6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장례 는 전통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였으며, 유 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운 대사 입적」(한용운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매일신보』 1944년 7월 1 일자 기사, 국립중앙도서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