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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박원희 부부와 동생 김사민의 비극적 서사 55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서대문 감옥에 복역 중 부당한 대우에 항의 하여 간수의 칼을 빼앗아 저항하다가 이 사건으로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아 정신이상이 되었다. 1924 년 7월 출옥 후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에서 어머니 의 간호를 받았다. 그 뒤 1925년 3월 조선노동대회 를 경성노동회로 개편하는데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또 1925년 9월 이방, 장기영 등과 노동운동 사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박원희·김사국 부부, 북간도에서 동양학원 등 민중 교육운동에 헌신하다 박원희(朴元熙)는 1898년 충남 대전 출신으로 1916년 3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 하고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녀 는 1921년 7월 김사국과 결혼하고 10월 무렵 김사 국과 일본 도쿄에 건너갔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사 회혁명당을 만들고 『5.1신보』 발기에 참여하고 같은 해 11월에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 결성 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박원희 는 밤에는 양복직공으로 노동하며 학비를 벌고, 낮 에는 대학에 다니며 사회학과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922년 10월 무렵 국내에서 김사국이 서울 파 ‘공산주의 그룹’을 만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파 견되었을 때 박원희도 같이 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 러나 박원희와 김사국은 1922년 11월 ‘신생활사 필 화사건’이 발생하자 귀국을 하지 못하고, 1923년 3 월 북간도(중국 연변) 용정(龍井)에 도착했다. 김사국 은 동아일보 간도지국장 김정기, 조선일보 기자 출 신으로 대성중학교 교사인 방한민(方漢民) 등과 대 성중학교 내에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했다. 동양학원은 대성중학 졸업생들을 용정에 남아있는 일본의 간도총영사관 건물. 일제 탄압의 총본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