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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재명(李在明) 의사 55 상경하여 서울 남부에 모의 거처를 정하였 다. 자신과 미국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는 동래부의 김병록을 급히 서울로 불러 올려 거사에 가담시켰다. 김정익 · 이동수 · 전태선 등 동지들도 서울로 올라왔다. 17일경 이들 은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갖고, 먼저 이완용을 죽이고 이용구를 나중에 죽이 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과 동시에 무기 분배 를 마치고 김용문(金龍文)에게 그 사실을 알 렸다. 매국노 총리대신 이완용 처단 의거, 사형으로 순국 이후 기회를 엿보던 중 김용문으로부터 이 완용 등 매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鍾 峴)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통지 를 받았다.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이동수· 김병록와 함께 천주교당 앞으로 가서 이완용 의 귀로를 기다렸다. 이날 오전 11시 30분경 드디어 이완용이 인력거에 타고 앞을 통과하려고 할 때에 노 상 북측의 전신주 그늘에서 뛰어나와 비수를 휘둘러서 이완용의 왼쪽 어깨를 찔러 치명 상을 입혔다. 이후 하차하여 도망가려는 이 완용의 허리 등 두 곳을 찔렀다. 다시 공격하 려 할 때 인력거꾼(車夫) 박원문(朴元文)이 이 를 저지하려고 하자 찔러 죽이고, 이완용을 척살하려는 순간에 이완용 호위순사에 의해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붙잡혔다. 동지 이동수 · 김병록은 다행히 도 피하였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공판정에서 일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혼 자 모든 책임을 떠맡으려는 의연한 태도로 자신은 국가에 바친 몸이므로 변론할 것이 없다고 하며, 연루된 동지들의 무죄를 주장 하였다. 결국 1910년 5월 18일 안병찬(安秉 瓚)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경성지방 재판소에 서 이재명에게는 사형, 김정익 · 이동수 · 김병 록 · 조창호 15년, 오복원 · 전태선 10년, 박태 은 · 김용문 7년, 이학필 · 김이걸·김병현 · 이응 삼 5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이재명 의사 판결문 이재명은 법정에서 조금도 굴함이 없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 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 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 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7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 기각,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2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99년 의거 현장이었던 명동성당 앞에 “이재명의사 의거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졌 다. 2001년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에서는 전 북 진안군 진안읍 진안이씨 문중 재실 앞에 ‘이재명의사 동상’을 세웠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