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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영월엄씨대종회보 40호 누구에게나 다 아픈 가족 이 있겠지만 여기 공개 하는 가족은 울산광역 시 정무부시장을 역임 한 엄창섭(嚴昌燮) 종 친의 애달픈 가족사다. 종친의 조부 주영(周永, 1894∼1914)공은 20세에 타계하셨고 조모님 은 16세 때 시집와서 2년 만에 홀몸이 되었으 니 그 비통함을 무엇에 비하랴. 다행히 뱃속에 는 아들 주동(柱東)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엄창섭 종친의 부친이 되신다.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난 부친은 일제 때 경남 도에서 2명을 뽑는 약업(藥業)시험에 합격하 였고 부산에서 약국을 경영하였으나 1946년 31세의 나이에 요절(夭折)하신다. 종친이 6세 때다. 할머니(淸安 李氏)와 어머니(靑松 굸氏)의 지 극정성으로 성장한 종친은 서울대 법대에 입학 하였고 재학 중 능통한 외국어 실력으로 상공부 장관의 비서로 발탁된다. 당시 70년대의 시대 상황은“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던 때다. 상공부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수출을 목표로 모 든 역량을 집중할 때로 영어는 물론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종친은 잠시의 틈도 없이 외 국인들과의 통상 상담에 여념이 없었고 세계를 누비며 동분서주하였다. 1989년 8월 16일 새벽 종친의 고향집 가까 이 살고 있던 그의 큰 당숙(嚴柱煥)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다. 당시 런던 무역관으로 근무하 던 종친의 전화였다. 고향에 홀로계시는 할머니 가 돌아가실 것 같은 예감이 드니 급히 가보시 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남편과 아들은 물론 며느리마저 앞서 보냈던 할머니는 91세의 굴곡진 인생을 마무리한다. 손자를 보지 못해 숨을 거두면서도 애타게 찾고 있었고 승증손(承 曾孫)인 그는 임종을 못하고 외국에서 회환의 눈물만 흘렸다. 장례를 마치고 유품(遺品)을 정리하던 두 분 의 당숙(堂叔)은 당신 아들(柱東)의 유품을 발 견한다. 소화(昭和) 12년부터 19년(1938∼ 1946)까지의 일기장과 낡아서 너덜해진 당신 의 불경(金剛經)책 한권이다. 43년간을 간수한 유품(遺品)이다. 그리고 언문과 한자에도 익숙 했던 당신의 글은 단 한글자도 남기지 않았던 반면 시동생 만영(1901∼1945)공이 21세 (1922년)때 쓴 서한문의 초안이 두루마리로 함 Ⅰ 어느 일가분의 가족사 엄 정 의〈울산종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