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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이 관찰사의 편지를 전함에 관찰부로 갔다가 곧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이어 안병찬, 홍건, 송병직 등 모두 23명이 구금되었다. 이설은 구금된 후 죽게 될 것을 예상하여 병중인 모친에게 편지를 쓰기를 “대종가에 양자로 들어갔으니 우리 어머니 아들이 아니 오, 국가에 몸을 허락하였으니 우리 어머니 아들이 아닙니다. 지금 당한 경우는 조온의 죄를 면할지 모르겠습니다.”라 하여 후한의 ‘조온웅비(趙溫雄飛)’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 책하였다. 그는 이어 옥사의 벽에 “5백년 예 의의 나라와 수십 대 양반의 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천운이니 어 찌하랴”라고 썼다. 이설은 김복한 등과 함께 12월 30일 서울 로 압송되기 위해 홍주를 출발하였다. 1896 년 1월 1일 신례원에 도착하였을 때 이승우 는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소식을 듣고 이 설 등을 다시 홍주로 불러들이고 이설을 비 롯한 김복한, 홍건, 안병찬, 송병직, 이상린 (이상, 홍주6의사) 이외의 17명은 석방시켰 다. 그는 1월 13일 홍주 일대 사민(士民)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 다. 1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여 한성재판소의 옥사에 구금되었다. 이후 2월 13일 고등재 판소로 옮겨 취조를 받기까지 한 달여 옥고 를 치렀다. 이 사이에 김복한의 근친인 김종 한이 면회하여 주육과 떡을 보내는 등 면회 자와 음식을 넣어주는 이가 이어졌다. 이설 은 면회 온 아들을 통해 밖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이천의진(利川義陣)이 남한산성에서 기세를 올리는 일, 나주의병에게 나주참서관 안종수가 처형당한 일, 그리고 천안군수 김 병숙이 제천의병에게 죽은 일 등을 알게 되 었다. 드디어 2월 25일 고등재판소에서 재판 장 이범진의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 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 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차마 군부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을 묘사한 삽화 1906년 5월 홍주성전투를 그린 기록화(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