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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 달성친목회, 대구지역 1910년대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다 1913년 서상일이 달성친목회를 재흥하여 조직을 정비‧강화하면서 독립운동 단체로 이행하는 양상 을 띠었다. 재흥된 달성친목회의 회원은 400~500명 정도이며, 회원으로 조직된 강의원간친회의 구성원 은 40~50명이었다. 달성친목회는 대구 출신 청년지사 서상일·윤창기· 정운일·김진만·서창규·이시영 등을 비롯하여, 달성 친목회의 발기인 이근우·김용선, 부속기구인 하기강 습소 소장 서기수, 청년체육구락부 발기인 허백·윤 세린·박용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지연·혈 연·학연으로 연결된 부호 및 유력자의 자제들이거나 신교육을 받은 계몽지식인들이었다. 달성친목회 회원들의 직업은 미곡상 · 제조업 · 전당 업 · 은행원 등으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부 회원 들은 지방의 중 · 소지주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며 축적된 자본을 상업 부문에 투자하고 있었다. 대부 분 신교육을 통해 신사상과 신학문을 수용하였으며, 상업 활동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이들 이 직면하고 있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 법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달성친목회는 처음 국권회복을 목적으 로 친목회를 표방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결성되었 으며, 국권상실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로 이행되어 갔다. 이들은 친목회를 표방하여 합법적인 활동 공 간을 마련하였으며, 상업 활동의 기반 위에서 계몽 과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달성친목회의 회원은 조선국권회복단의 주축이 되었다. 아울러 서상일·남 형우·박영모·신상태 등은 대동청년단, 김재열·정운 일·이시영·정순영·홍주일 등은 광복회에 참여하여 1910년대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 었다. 3. 애국계몽운동은 의병전쟁과 함께 한국독립운동 의 원류 대한제국기 대구지역 국권회복운동은 1910년대 독립운동으로 계승·발전되었고, 1910년대 독립운동 은 1919년 3 · 1운동과 1920년대 독립운동의 국민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원류이다.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대구지역은 개항이후 정치행 정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일찍부터 일본군이 주둔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전쟁 당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개항 이후 성장한 상인자본가와 영남 각지에서 모여든 지 주와 유생이 주도하여 그 단체를 조직하였다. 바로 대구광학회 · 대구광문사 · 대한협회 대구지회 · 교남교 육회 등이다. 이들은 신교육구국운동과 국채보상운 동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일제 침략에 편승하는 한계를 드러냈고,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는 친일의 선두에 섰다. 애국계몽운동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나타난 것이 1908년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였다. 달성친목 회는 대구를 비롯한 각 지역의 혁신적인 유생들이 참여하여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였다. 이들은 청 년의 교육 · 실업 장려를 표방하였다. 그렇지만 비밀 리에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 적 활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한 이후에 는 독립운동 단체로 이행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