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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4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3 · 1운동 점화에 기여 신규식의 둘째 업적으로는 1919년 3 · 1운 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춧돌 역할 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1917년 조소앙(趙素 昻),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 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핀란드, 폴란드 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 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 기관 즉 정부의 조직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국내와 일본 등에 동지들을 밀파하여 동경 (東京)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 쳤다. 임시정부 분열에 통분, 25일간 단식. 43세로 삶을 마감 1919년 3 · 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었 다. 이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임 시사무소를 개설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후일 언론인이며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명인 오세창은 ‘3 · 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 화되었다’고 단언했으며 당시 일본 경찰 비 밀 정보도 ‘…이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 하이 거주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선동에 크 게 힘입었다’고 기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21년 10 월에는 임시정부의 특파전사(特派傳使)로 중 국 남방의 광동성(廣東省) 광저우(廣州)로 파 견되었다. 그리하여 손문의 중국호법(護法)정 부와 교섭한 결과 11월에는 마침내 중국 혁 명정부와 공식 외교관계가 성립(사실상 임시 정부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 후 재정 형편이 어 려워지면서 일부의 파벌의식 등이 뒤엉켜 임 시정부 요인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1921년 4월 이후 임시정부는 위기에 봉착했 다. 특히 이 해 6월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안을결의했 고, 상하이에 6개월간 체류했던‘재미파(在美 派)’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신규식은 병석에 누워 임시정부 요인들의 단 합을 요구하며 임시의정원 회의 참석을 거부 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신규식은 국 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이 나 불식(不食) · 불언(不言) · 불약(不藥)을 고집 했다. 결국 1922년 9월 25일,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린 것으로 전 한다. ‘정부… 정부…’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 두는 그의 목에서 새어 나왔다. 단식 25일만 에 처음 나온 말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