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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4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 특집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현실 인식과 대응’ 였고,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위임통치청원을 ‘성 토’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하지만 워 싱턴회의를 전후한 시기 신채호의 국제정세 인 식만 놓고 본다면 그가 강력하게 비난했던 이승 만을 대표로 삼아 워싱턴회의에 파송된 한국대 표단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신채호 가 한국을 ‘동양의 발칸’으로 설정하고 한국을 독 립시켜 ‘동아시아 힘의 완충지대’로 삼아야 한다 고 주장했던 점 또한 이승만과 동일했다. 신채호는 선무장투쟁 - 후외교 방식의 입장이 었다 신채호는 이처럼 워싱턴회의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상황 속에서도 동시에 반임정 노 선을 견지하였다. 외교독립론자들과 신채호의 간극이 민족자결주의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방 식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국제정세 속에서 독립 운동론을 적용하는 방식에서의 차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 과정에서 ‘소 수 제국주의 야심가’들의 잘못된 판단이 참혹한 결과를 야기한 상황을 목도하면서 민족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역사 주체를 영웅(英雄)에서 민중 (民衆)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약육 강식과 강권의 시대가 끝나고 ‘인심이 아픈 대중 들을 생각하고 흐름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새로 운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신채호는 3·1운동의 과정에서 ‘남녀노소를 막 론하고 만민이 한 소리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모습’에서 한국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시대’가 시 신채호의 창간사와 독립운동 경과 등이 수록돼 있다(문화재청 제공). 북경군사통일회의 기관지 『대동(大同)』(1921년 발간,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