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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이와는 별도로 인도 주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를 인도 · 버마전선 에 파견했다. 인면전구공작대는 1943년 8월 이후 일제의 패망 때까지 영국군에 합류해 임팔전선과 버 마탈환작전에 참여했다.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은 광복군이 연합군과 합작해 직접 대일전쟁에 참전했 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8 · 15해방과 미완의 독립전쟁 임시정부는 1920년에 이미 ‘독립전쟁 원년’을 선 포했다.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래서 ‘국군’을 창설하기 위해 애 썼다. 그러나 ‘국군’을 창설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 다. 임시정부의 오랜 염원은 한국광복군 창군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임을 자임했다. 광복 군이 있었기에 임시정부는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다. 연합국이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을 통 해 한국의 독립을 공인하게 된 배경에는 임시정부와 광 복군의 대일항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45년 8 · 15 해방 후 지청천은 일본군에 동원되 었던 청년을 중심으로 광복군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광복군 확군운동은 기본적으로 국내에 돌 아가 국군을 만들려는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데 국내의 미군정이 한국광복군이 군대 자격으로 귀 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중국 국민당정부도 1945년 12월에 접어들면서 확군활동을 금지했다. 결국 광복군은 1946년 초부터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의 귀국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1946년 5 월 16일 지청천은 ‘한국광복군복원선언’을 발표했 다. 사실상 해산을 의미하는 선언이었다. 8 · 15해방 과 동시에 찾아온 분단체제 아래 한반도의 남쪽을 통치하게 된 미군정의 외면 아래 광복군은 건군의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한영공동작전 기념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