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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3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한 이 시기 신문·잡지들에 많은 논설을 써서 국 권회복을 위한 신교육구국사상 · 실업구국사 상 · 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 · 대동사상 등 을 설파하고 국민을 계몽하였다. 이 시기 그 의 사상의 특징으로는 구국계몽운동과 무장 운동(의병운동)을 연계하여 함께 전진시킬 [연무제진(聯武齊進)] 것을 강조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때 강조한 구국계몽사상과 운동의 핵심 은 자강론(自强論)에 의거한 교육구국과 실 업구국에 있었다. 한민족과 국가가 생존경쟁 에서 승가 되려면 강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 강자는 다른 강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 라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이어야 한다는 논 리였다. 1906년 3월에 창립한 대한자강회에 가입 하였고, 10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 창립 을 주도하였다. 이후 기관지 『서우(西友)』의 주필이 되어 애국계몽에 진력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 안창호 · 전덕기 · 이회 영 · 이동녕 · 이동휘 · 유동열 등을 비롯한 애국 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로 창립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 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북학 회(西北學會)가 창립되자 이 학회를 지도하 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이 되었다. 이 무렵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 서북 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가 설립되었는데, 교 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서북학회 활동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 교 설립을 추진하여 1908년 5월부터 1909 년 말까지 63개 지교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 동을 확산시켰다. 국망 후 해외 망명, 저술 · 계몽활동과 독립 운동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되면서 『황성신문』,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언론기관이 폐쇄되었다. 한편, 직접 저술한 서적들은 ‘금서’로 압수되고 탄 압 받았다. 이에 1911년 4월 국외 망명을 결행하여, 남만주(중국 동북지방) 환인현(桓仁縣)의 대 종교도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기거하며 『동 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 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 祖)』,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단조사고(檀 祖事攷)』,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 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 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박달 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이듬해에 홍콩 (香港)으로 가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으로 활동하며,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 오(梁啓超)·탕샤오이(唐紹儀)·징메이주(景梅 九) 등의 중국혁명동맹회 계통 인물들과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