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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53 독립항쟁 극대화를 위한 이원체제 운영 │ 민정과 군정 이들은 독립항쟁의 극대화를 위하여 민정기관과 군정기관의 이원 체제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먼 저 자치 기관으로 우리 민족의 고토인 만주의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이상룡을 사장으로 한 경학사 를 1911년 조직하였다. 경학사는 특히 인재 양성을 중시하여 신흥강습소를 세우는 등 교육사업에 중 점을 두고 이철영, 이동녕이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중국인의 박해와 풍토병 그리고 흉년이 들어 해 산되었고 1911년 공리회가 조직되었다. 다시 1912년 허혁을 단장으로 한 부민단이 통화현 합니하에 조직되었고 1919년 이탁을 중앙총장으로 한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어 유하현 삼원포에 터를 잡았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혁신유림 친인척 2,500여 명이 만주로 집단 망명함에 따라 자치 기관의 관리와 운영은 안동 혁신유림들이 주도하였다. 군정 기관으로는 1912년 통화현 합니하에 정착지를 확보하 여 이주하면서 부민단을 조직하고 학교를 새로 설립하였으며, 1913년 이름을 신흥중학교(교장 여준) 로 바꾸었다.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을 다른 중학교로 넘기고 군사반만 전력함으로서 비로소 신흥무관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체계적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영기지 건설 │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1914년 신흥학우단과 부민단은 독립전쟁 을 준비하기 위하여 백두산 서편인 통화현 팔리초구 소북차에 백서농장(장주 김동삼)을 만들어 수천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군 영을 세웠다. 신흥중학교 졸업생들과 각 분 교 , 노동강습소 등의 훈련생 385명이 입영하 여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 였다. 이후에도 신흥학교 출신 청년들이 체 계적인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비밀 군영기지인 마록구 농장, 길남장이 설치되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신흥중학교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급증하여 수용에 어려움을 겪자 유하현 고산 자로 옮기고 신흥무관학교(교장 이세영)로 이름을 바꾸었다. 합니하에 있던 기존 학교는 분교로 삼 았으며 통화현 칠도구 쾌대무자에 또 하나의 분교를 두어 모두 3개의 학교를 운영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운영과 정신 │ 교육목표와 교훈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고급간부 양성을 위하여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었고 분교에서는 3, 6개월 과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안동 출신 인사들이 주력이 되어 만든 군영인 백서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