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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구연영 선생 53 역적 연고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 정된다. 1895년 8월 일본인들이 명성 황후를 참살한 을미사변과 1896 년 11월 공포한 단발령(斷髮令) 으로 인해 민족 자존의 상징과 존 엄이 무참히 짓밟혔다. 이로 인 해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 각지에 서 동시다발적으로 항일 의병이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구연영은 서울에 거주하던 중 단발령이 공 포되자, 김하락(金河洛)을 비롯하 여 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 龍熙) 등 우국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 기로 결의하고, 한강을 건너 1896년 1월 1일 경기도 이천에 도착했다. 이천에서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화포군 (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협 의하여 화승총을 잘 다루는 포군(砲軍) 100 여 명을 선발하여 근간으로 삼고 인근 각지 의 의병 모집에 나섰다. 이후 경기도 양근·지 평 일대로 들어가 그 지역에서 300명의 의병 을 모집하였다. 또한 조성학은 광주, 김태원 은 안성, 신용희는 음죽으로 파견되어 각 군 (郡)에 소속된 포군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 집하였다. 이처럼 인근 각지에서 모집한 의 병들이 이천에 모여 연합 의병의 형태로 ‘이 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의병부대를 편성 하였다. 이천수창의소 의병부대 중군장 그는 이천수창의소에서 의병장 이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중군장을 맡아 지휘부에 참여 하였다. 이때 창의대장에는 민승천(閔承天)이 추대되었고, 도지휘(都指揮) 김하락·도총(都 總) 조성학·좌군장 김귀성(金龜性)·우군장 신 용희·선봉장 김태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뒤 의병부대의 편제는 여러번 바뀌었으나, 시종일관 중군장의 직책을 맡았다. 1896년 1월 18일 이천 널고개[백현(魄峴)] 에서 일본군 100명을 상대로 매복전을 벌여 첫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백현 전투 승전 후 그 기세를 이어 패주하는 적을 광주 노루목 [장항(獐項)] 장터까지 추격해 무기와 군량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현(梨 峴)에 주둔하던 이천수창의소 의병은 2월 13 일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 200명의 공격을 받아 패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현 동 정부에서 내린 단발 지령문과 반대통문(독립기념관 제공)